29일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는 영국 하원에 출석해 “영국이 공식적으로 EU 탈퇴 협상에 돌입한다”고 공표했다. 이에 앞서 팀 배로 EU 주재 영국대사는 전날 메이 총리가 서명한 탈퇴 통보문을 벨기에 브뤼셀 EU 본부에 전달하며 2년간의 협상 시작을 알렸다.
44년 만의 이혼절차 개시를 앞두고 금융시장은 일단 차분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영국과 EU 모두 앞으로의 협상에서 강경 일변도를 예고하고 있어 영국이 무협정 상태에서 EU를 박차고 나가는 ‘무질서한 브렉시트’ 등 최악의 상황이 일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해 전문가들은 지난해 6월 국민투표 이후 기준금리 인하와 양적완화(QE) 확대를 통해 충격 완화에 나섰던 영국중앙은행(BOE)이 상황을 지켜보다 다시 통화정책 완화에 나설 가능성도 있다고 진단했다.
이날 파이낸셜타임스(FT)는 영국이 지난 1월 단일시장 체제와 관세동맹에서 벗어나는 완전한 분리 모델인 ‘하드 브렉시트’를 선언하면서 탈퇴 협상이 당초 예상보다 강경 일변도로 치닫거나 중도에 결렬될 가능성이 대두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영국에 진출한 EU 기업들은 전일 브렉시트가 미칠 영향력을 우려하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34개국 기업이 포함된 40개 유럽 비즈니스 단체는 성명에서 협상 중에도 단일시장 체제가 흔들림 없이 유지되도록 ‘포스트 브렉시트 협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영국은 교역의 46%를 EU에 의존하고 있는 등 상호 의존도가 높아 양측이 협정 공백 상태에 처할 경우 교역 등에 상당한 차질이 전망되기 때문이다.
실제 협상에 유리한 국면을 차지하기 위해 양측이 수입제품에 대해 징벌적 관세를 부과하거나 복잡해진 통관 절차로 인해 물류 지연 등이 발생할 경우 양측 모두에 큰 타격이 불가피하다. 영국 유통 업계도 이날 EU의 징벌적 관세 부과를 회피하기 위한 과도기적 무역협정이 필요하다고 정부에 촉구했고 물류 업계 역시 통관 지연이 발생하지 않도록 영국이 EU 회원국 세관과 유사한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요구했다.
영국을 유럽 진출의 교두보로 삼아온 아시아계 기업들도 촉각을 곤두세우기는 마찬가지다. 일본 경제계를 대표하는 게이단렌 등은 4월 초 “경제를 신중히 고려해 협상에 임해달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할 예정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이 성명에는 “나쁜 협정보다는 협정이 없는 게 낫다”고 탈퇴 조건을 언급한 메이 총리의 ‘노 딜(no deal)’ 발언에 대한 비판도 담길 것으로 알려졌다. 신문은 또 영국이 9개월 전 국민투표를 통해 브렉시트를 결정했을 당시에도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신흥국들의 통화가 가장 크게 출렁인 바 있어 아시아 신흥국들이 이 같은 역풍을 우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EU 탈퇴로 영국은 EU 회원국 한 곳에서 금융사 설립 인가를 받으면 다른 모든 국가에서도 자유롭게 영업할 수 있는 일명 ‘패스포팅(passporting)’의 이점을 잃게 되는 등 금융 허브로서의 입지에 일정 부분 타격이 예상된다. 이미 골드만삭스·모건스탠리 등 미국 금융회사들은 영국의 인력을 독일·프랑스 등 EU 회원국으로 재배치하는 ‘비상계획(contingency plan)’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이스트앤파트너의 마틴 스미스 수석애널리스트는 CNBC에 “해외 자본에 기댄 영국 금융은 현지 경제의 10분의 1을 담당하고 있는 1위 산업”이라며 “브렉시트 협상 과정의 어려움은 자본지출 감소로 이어져 단기적으로 소매판매와 기업에 대한 여신 확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와 관련해 일각에서는 브렉시트로 인한 영국의 경기 위축이 현실화될 경우 BOE가 기준금리 인상 시점을 늦추고 양적완화 확대에 나설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BOE는 국민투표에서 브렉시트 찬성 결정이 내려진 직후인 지난해 8월 통화정책회의에서도 기준금리를 0.50%에서 0.25%로 낮추고 국채매입 목표치를 3,750억파운드에서 4,350억파운드로 높인 바 있다. 빅토리아 해슬러 스퀘어마일인베스트먼트컨설팅 리서치 부문 대표는 “영국이 당분간 금리를 올리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BOE가 주요국들과는 달리 좀 더 양적완화의 길을 걸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영국의 파운드화 가치는 이날 한때 전일보다 0.35% 떨어진 파운드당 1.2377달러를 기록하다 낙폭을 줄여갔다. 지난해 6월 이후 9개월 동안 브렉시트에 따른 리스크가 이미 파운드화 가치에 충분하게 반영돼 있어 향후 향방은 양측 간 협상의 순항 여부에 달렸다고 전문가들은 전했다. /연유진기자 economicu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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