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8년 4월5일, 영국 남서부 맘즈베리의 작은 마을 웨스트포트. 스페인 무적함대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놀란 임산부가 아기를 조산했다. 칠삭둥이로 태어난 아기의 이름은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 17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사상가의 한 사람인 홉스는 훗날 자신의 출생과 관련해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는 나를 공포와 쌍둥이로 낳았다.” 홉스는 4살 때 헤어진 부친의 성격도 물려받았다.
홉스와 똑같은 이름을 가진 부친은 부목사였으나 성미가 급해 곧잘 주먹을 휘둘렀던 인물. 토마스 홉스 목사는 교구 목사를 때려 해직되고 가족을 떠났지만 시시비비를 가리는 성격은 토마스 홉스 주니어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홉스는 주먹 대신 정교한 논리를 동원했다. 홉스의 싸움은 사색과 저술이었다. 다만 심지가 굳었는지는 의문이다. 공포 때문에 그랬는지 기회주의자적 변모를 적지 않게 보였다.
홉스는 늘 강한 편 쪽에 선다는 평을 들었다. 국왕의 권력이 강할 때는 왕당파와, 의회가 권력을 잡으면 의회파와 가깝게 지냈다. 문제는 어느 쪽도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는 점. 청교도혁명 직후 의회가 왕당파라고 지목하자 공포에 젖어 프랑스 파리로 도망쳤다. 망명지인 파리에서 왕당파에게 무신론자로 공격받고는 런던에 돌아와 크롬웰 밑에서 일했다. 크롬웰 사후에는 왕정복고를 위해 20여년 만에 돌아오는 찰스 2세를 궁정 문 앞에 앞서 나가 맞아들였다.
오락가락하며 이쪽저쪽을 넘본다는 조롱 속에서도 홉스는 91세라는 천수를 누렸다. 귀족 집안의 가정 교사로 평생 특별 연금도 받았다. 화폐를 혈액으로 비유한 점으로도 유명하다. 철학자 고병권의 역저 ‘화폐, 마법의 사중주’에 따르면 홉스는 윌리엄 하비의 혈액순환론(1628)에 크게 영향받았다. 대표작 ‘리바이어던(Leviathan·1651)’에서 홉스는 “국가는 징수관 수취관 등의 정맥을 통해 금고를 채우며, 재무관 및 몇몇 지불대행 관리라는 동맥을 통해 공공 지불을 수행한다”며 “화폐는 국가의 혈액”이라고 정의했다. 영국 왕립학회의 기원도 홉스의 토론 모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표작 리바이어던에는 애매모호한 구절이 나온다. 주권자에 대한 정의에서 보기에 따라 왕당파로, 크롬웰 지지자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 것이다. 홉스가 누구를 지지했는지를 떠나 분명한 사실은 하나 있다. 계약을 통한 주권의 양도. 홉스는 우선 인간의 삶을 부정적으로 봤다. ‘자연상태의 삶은 고독하고 불결하며 야만적이고 짧다. 자연상태란 만인(萬人)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다.’ 17세기 유럽판 성악설인 셈이다. 늑대의 심성을 가진 인간들의 사회가 어떻게 굴러갈까. 이른바 ‘홉스적 질문’이다.
홉스는 답을 ‘계약’으로 봤다. 개인들이 자연상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욕구와 의지를 군주에게 위임하기로 계약하고 통치에 따른다는 것이다. 홉스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수중괴물 리바이어던만큼이나 막강한 권력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권력에 무한한 권한을 부여해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발전시키자는 얘기다. 리바이어던은 논란을 낳았다. 당장 교회가 발끈했다. ‘나’라는 주체를 신에게서 분리했기 때문이다.
평가도 분분하다. 군주론을 지은 마키아벨리와 더불어 절대왕정에 힘을 실어줬다는 시각과 자연상태의 인간을 시장적 개인으로 봤다는 점에서 시장주의의 원형이라는 해석이 엇갈린다. 무엇이 맞을까. 한국에서 홉스의 지위는 특별하다. 절대 권력을 추구하는 권력자들에게 영감을 주고 합리화하는 구실을 준 인물로 평가받는다. 법학과 교수이면서도 인문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저술로 유명한 영남대 박홍규 교수는 플라톤의 ‘국가’로부터 내려오는 독재의 논리가 홉스를 거쳐 자유주의 사상가들에게 이어진다고 간주한다.
더 고약한 경우도 있다. 사회적 다윈주의자, 백인 우월주의자인 독일 정치철학자 칼 슈미트는 1차 세계대전 패전 독일의 혼란기와 ‘리바이어던’을 결합시켰다. 사회가 극도로 어지러울 때 권력이 절대권력으로 둔갑해 법률이 정지되는 ‘예외상태’를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정치철학·1922)한 것. 슈미트의 예외상태는 절대권력자가 법 위에 군림하며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시스템이다.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이런 생각의 토양에서 나왔다.
한국의 10월 유신과 3공도 다르지 않다. 누군가 말했던 ‘비정상의 정상화’에도 이런 맥락이 깔려 있는지도 모른다. 홉스에게 국가 권력은 사회 구성원 각자의 안전을 보장할 때만 정당화할 수 있으나 리바이어던의 변종은 국민이 안전과 권리 위에 군림한다. 현대판 사회계약인 투표를 통해 권력을 양도하는 시민의 선택이 옳은지도 문제다. 민주주의가 발달했다는 영국의 브렉시트(Brexit)나 미국 대통령 선거를 보면 주권 양도와 행사의 부작용이 갈수록 심해지는 것 같다
리바이어던은 과거의 이야기일까. 그렇지 않다. 독일 사회학자 율리히 벡(1944~2015)의 ‘경제 위기의 정치학’에 따르면 글로벌 리스크가 칼 슈미트의 ‘예외상태’를 강요하는 세상이다. ‘더 큰 시장과 무역, 소비, 관광을 위한 보다 최신 기술, 끝없는 경쟁이 통제할 수 없는 부작용’을 만든다는 것이다. 종국에는 미국과 유럽까지 흔들리는 극도의 혼란 상태가 발생하고 독재를 허용하는 예외상태를 찾을 수밖에 없는 시대라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상황을 방어할 것인가. 리바이어던에 비슷한 답이 있다. 홉스는 ‘리바이어던’의 상당 부분을 할애해 ‘절대권력의 힘을 약화시키는 일’을 적시하며 금지시키라고 권고한다. ‘이웃 나라의 통치를 비교 연구하고 모방하려는 태도,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 및 정치 관련 서적을 읽도록 허용하는 것, 과도하게 인기를 끄는 유력한 신민이 출현, 권력은 분산되어야 한다는 주의 주장을 펼치는 무리들, 판단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절대권력에 대항하는 자유를 주는 행위….’
리바이어던(절대권력)을 위한 홉스의 처방을 정리하면 이렇다. 정치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말 것. 특히 외국 사례와 고전 공부 금지, 국민에 투표권 부여 금지…. 한 마디로 어리석은 백성(愚民)으로 남겨두라는 주문이다. 거꾸로 가는 세상, 혹여 발생할 수도 있는 경제 혼란과 ‘예외 상태’ 강요를 피하려면 홉스의 금지부터 풀어야 한다. 적극적으로 정치에 가담하고 외국 사례와 고전을 공부해 집중과 비대화를 추구하는 절대 권력과 맞서라는 얘기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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