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7일 정오께 서울 강북구 수유동의 한 커피숍. 말끔한 정장 차림의 20대 남성이 가게 안으로 들어와 앉는다. 잠시 후 옆 테이블에 앉은 20대 여성이 남성으로부터 전화기를 건네받고 커피숍 밖으로 나선다. 곧바로 남성도 여성을 따라 가게를 빠져나간다. 이 둘은 커피숍 앞에서 약속이나 한 듯 현금 6,000만원을 주고받는다.
최근 한 커피숍 폐쇄회로(CC)TV에 찍힌 중국 전화금융사기(보이스피싱) 일당에게 속은 A(28·여)씨의 실제 피해 상황이다. 피의자와 만나 돈을 건네고 헤어지기까지 범행에 걸린 시간은 총 5분37초. 벌건 대낮에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A씨는 그렇게 보이스피싱 일당에게 전 재산 6,000만원을 건네 주고도 오히려 안도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며칠 전 중국 칭다오(靑島)에 본거지를 둔 보이스피싱 일당은 A씨에게 전화로 “서울중앙지검 첨담범죄수사팀이다. 사기 사건을 수사 중인데 A씨 명의로 대포통장이 개설돼 있다. 피해자인지 가해자인지 먼저 확인해야 한다”며 가짜 검찰청 사이트 주소를 불러줬다. 해당 사이트에서 본인 이름으로 된 사건 접수번호를 직접 확인한 A씨는 “검찰청에 와서 조사받는 대신 통장에 있는 돈을 금융감독원 안전계좌로 옮겨 놓을 테니 직원에게 전달하라”는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며칠 뒤 이들 일당은 A씨를 만나 현장에서 5만원권으로 된 현금 뭉치를 건네 받았다. 한국말에 서툰 중국인 남성은 가짜 신분증과 금감원 서류를 내민 뒤 말 한마디 없이 돈만 받고 사라졌다.
지난 15일 서울 강북경찰서는 중국인 길모(28)씨 등 3명을 사기 혐의로 구속했다. 경찰 조사 결과 A씨가 커피숍에서 만난 남성은 중국 보이스피싱 조직의 수거책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A씨는 이날 만난 남성을 금감원 직원으로 굳게 믿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A씨는 혹시나 하고 지인에게 이런 사실을 털어놨다가 뒤늦게 자신이 보이스피싱에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번 사건의 피해자는 A씨 말고도 5명이 더 있었다. 보이스피싱 조직의 표적은 20대 미혼 여성으로 이들의 직업은 교사, 직장인 등 다양했다. 피해자들은 불과 일주일 사이 같은 방식으로 보이스피싱 일당에게 전 재산을 넘겼다. 추가 범행을 위해 B(25·여)씨에게 접촉 중이던 길씨 일행은 현장에서 잠복 중인 경찰에 검거됐다. 가까스로 피해를 면한 B씨는 경찰에게 “검사가 나를 보호해주려고 그러는데 왜 그러느냐”고 따지기도 했다고 경찰은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지난해 보이스피싱 피해는 4만5,000여건에 피해 금액만 1,9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 과거 노년층을 상대로 한 납치형, 칩입형 범행에서 최근에는 20~30대 젊은 층을 노린 대면편취형 범행이 늘고 있다. 혼자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섰다가 오히려 이들의 꼬임에 빠져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다.
이번 사건을 수사한 경찰은 “혼자 사는 젊은 층일수록 주위와 소통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결정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며 “여성, 노인, 사회초년생 같은 사회적 약자일수록 주변과 상의하고 도움을 청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최성욱기자 secret@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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