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최초의 현역 대통령 탄핵. 지난 10일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헌재의 파면 선고가 이뤄지면서 3개월 넘게 계속되던 탄핵 정국이 끝났다. 국민들의 관심은 이제 오는 5월 9일 이뤄질 대선으로 향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보호무역주의 공세,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배치에 따른 중국의 보복, 노골화하는 일본의 군국주의 바람 등의 대외 불안 요인. 저성장 국면에 들어간 가운데 저출산과 고령화, 가계 부채, 내수 부진 등의 내부 위험 요인. 이에 더해 탄핵 정국의 후폭풍으로 세대간·진영간의 갈등이 극에 달했는데도 위기 돌파의 정치 리더십은 잘 보이지 않는 실정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대 대통령은 인수위원회도 없이 임기를 시작해야 한다. 대한민국이 좌표를 잃고 표류하고 있다는 비관론이 커지고 있는 이유다.
과거에도 이런 위기는 있었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닥친 한국전쟁과 4·19혁명이 그랬다. 5·16 쿠데타와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신군부 쿠데타도 마찬가지였다. 위기를 겪으면서 후퇴할 때도 있었지만 결국 우리는 꿋꿋이 전진하며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뤄냈다.
그래서 준비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을 이끌었던 11명의 대통령을 살펴봤다. 역대 대선 과정에서 있었던 네거티브 전도 정리한다. 이를 바탕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을 국민과 함께 헤쳐갈 인물을 뽑게 될 다음 대선을 준비하고자 한다.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부터 이제는 파면된 박근혜 전 대통령까지. 해방 당시 45달러에 불과했던 국민소득은 이제 3만 달러를 바라보고 있다. 70년간 대한민국을 이끌었던 11명의 대통령. 그 속의 사건과 인물들을 들여다봤다.
◇이승만 대통령(1~3대)-대한민국 헌법의 탄생...‘사사오입 개헌’으로 얼룩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은 1948년 7월 20일 대통령 선거로 당선됐다.
자유민주주의의 기틀을 마련하고 대한민국 헌법의 초석을 닦았다. 하지만 이후의 모습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친일파 청산을 하지 못한 것은 가장 큰 실착이었다. 사회 전반에 “친일을 하면 3대가 부자로 살고,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번져 나갔다.
6·25 전쟁 이후에는 권력을 지키기 위해 부정한 방법들을 동원했다. 초대 대통령에 한해 연임 제한을 폐지했던 ‘사사오입 개헌’이 대표적이다. 1960년 3월 15일, 4번째 임기를 위한 대통령 선거에서 이 대통령은 100%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투표함 바꿔치기 등 각종 불법을 동원한 부정선거였다. 국민들은 반발했다. 피의 화요일이라 불리는 ‘4·19 혁명’이 전국에서 진행됐다. 이날 하루에만 186명의 사망자와 6,00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1960년 4월 26일. 그는 국민들의 압박에 못 이겨 하야를 선언했다.
◇윤보선 대통령(4대)-장면 총리와의 동거
다음 정부는 대통령제에서 내각책임제로 권력 구조를 바꿨다. 1960년 8월 윤보선 민주당 최고위원이 4대 대통령으로 당선됐고, 국정 운영의 실질적 권한을 가진 국무총리는 장면이 맡았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았다.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간 갈등이 깊어지는 가운데 임기를 절반도 마치지 못했을 무렵, 대한민국은 또다시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파묻혔다.
◇박정희 대통령(5~9대)-눈부신 경제 성장, 뒤로 밀린 민주주의
1961년 5월 16일,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다. 군인들이 민주 정부를 무너뜨렸다. 그 주역은 박정희 당시 소장. 내각책임제는 2년 여 만에 대통령제로 변경됐다.
쿠데타의 명분은 경제성장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화폐개혁을 단행해 음지에 있던 돈을 양지로 끌어올리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국민들은 생각보다 더 가난했다.
박 대통령은 눈을 외부로 돌렸다. 서독으로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해 그들의 임금을 담보로 돈을 빌렸다. 1965년에는 한·일 협정을 체결, 국교 정상화와 식민지배 피해 보상의 명목으로 5억 달러의 유·무상 차관을 지원받았다.
끌어모은 자금을 바탕으로 한 경제 성장은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릴 만큼 눈부셨다.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했고, 1965년 105달러였던 1인당 국민소득은 불과 12년 후인 1977년 1,000달러를 넘었다.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빠른 경제 성장이었다.
박 대통령은 경제 발전을 이유로 독재를 합리화했다. 특히 헌법을 뜯어 고치고 유신체제를 선언하며 대통령직을 이어가려 한 것은 국민의 반발을 불러왔다.
견고하던 유신체제를 무너뜨린 시발점은 ‘YH무역’ 여공들의 투쟁이었다. 1979년 8월 회사의 부당함에 항의하던 여공들은 당시 제1야당이던 신민당사에서 농성했지만, 경찰은 야당 당사로 직접 들어가 진압에 나섰다.
YH 여공 사건은 같은 해 10월 ‘부마 민주 항쟁’으로 번져갔다. ‘독재 타도, 유신 철폐’의 목소리는 더욱 거세졌다. 결국, 1979년 10월 26일, 유신은 종말을 맞는다. 박정희 대통령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권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최규하 대통령(10대)-눈 앞에서 가버린 봄
민주주의가 눈앞으로 다가온 듯했다. 1979년 12월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빠른 시일 내에 헌법을 개정하겠다는 의사도 밝혔다. 국민들이 그토록 바라던 봄이었다.
◇전두환 대통령(11~12대)-‘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 되살아난 독재의 공포
희망도 잠시. 군사 정권의 공포는 되살아났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과 노태우 등의 세력이 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했다.
국민들은 반발했다. 다음 해 5월 민주 정부 수립을 위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신군부는 사회 혼란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정부가 장악됐고, 국회의 기능은 정지됐다. 신군부의 폭력 앞에 시위도 잦아들었다.
광주의 학생들과 시민들은 투쟁을 포기하지 않았다. 5월 18일 계엄령을 철폐하고 민주 인사를 석방할 것을 주장하며 광주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신군부는 시위대와의 협상을 거부하고 무력으로 이들을 진압했다. 10일 동안 군인들에 의해 희생된 사망 또는 실종자만 224명이었다.
무자비한 폭력 앞에서 봄은 또다시 멀어졌다. 개헌을 통해 독재 체제를 다진 그는 이른바 ‘체육관 선거’를 통해 11대·12대 대통령 자리에 연이어 선출된다.
민주화를 바라는 시민들의 열망은 더 이상의 독재를 용납하지 않았다.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
1987년 6월, 대학생 박종철이 고문을 받다 숨진 사건은 도화선이 됐다.
국민들은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왔다. 학생부터 넥타이 부대(직장인), 자영업자, 농민, 노동자 할 것 없이 모두가 민주화를 외쳤다. 마침내 1987년 6월 29일, 전두환 정권은 헌법 개정과 민주 선거를 약속했다.
◇노태우 대통령(13대)-“나, 이 사람. 보통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
1987년 12월, 국민들은 처음으로 대통령을 직접 뽑을 기회를 얻었다. 피땀 흘려 얻어낸 성취였다.
야당은 YS(김영삼 대통령)와 DJ(김대중 대통령)가 “서로 대통령이 되겠다”며 이전투구를 벌이는 바람에 단일화를 이루지 못하고 선거에서 또다시 패배한다. 대신 ‘보통사람’이라는 프레임으로 선거에 나선 신군부 출신의 노태우가 13대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노태우 대통령의 경제 성적표는 전두환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괜찮은 편이었다. 저유가 등으로 대외 환경이 좋았던 덕분이기도 했다. 노 대통령은 취임 직후 진행된 ‘88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데 이어 소련과 중국 등 공산국가와의 수교를 시작했다. 범죄와의 전쟁으로 사회질서를 바로 세우는 한편 분당과 일산 등의 신도시를 지어 주택 가격을 안정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군사 정권의 주역이었던 그의 과거는 사라지지 않았다. 퇴임 이후인 1996년 전두환 대통령과 함께 재판을 받고 22년형을 선고 받는다.
◇김영삼 대통령(14대)-권위주의적 통치의 종말과 함께 찾아온 IMF 외환위기
1993년 2월, 국회의원에만 9번 당선됐던 김영삼이 14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그가 ‘문민(文民)정부’를 출범하면서 32년 동안 이어진 권위주의적 통치는 종말을 고했다.
구시대의 잔재를 지우려는 개혁 정책들이 쏟아졌다. 또 다른 군사 쿠데타의 불씨를 끄기 위해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해체하고 고위 공직자의 재산 공개를 제도화했다. 실시 전날까지 극비리에 부쳤던 금융실명제는 우리나라 경제가 한결 투명해지는 계기가 됐다.
김 대통령의 지지율은 취임 초 80%를 훌쩍 넘었다. 인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1997년 전 국민을 고통 속으로 빠뜨린 IMF 외환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많은 기업과 금융 기관들이 문을 닫았고, 직장인들은 직업을 잃었다. 김 대통령의 지지율은 6%까지 추락했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평가를 들었던 대한민국 경제 성장의 신화가 종말을 고하는 사건이었다.
◇김대중 대통령(15대)-햇볕정책과 노벨평화상
외환위기가 찾아온 직후 취임한 김대중 15대 대통령은 ‘국민의 정부’를 지향했다.
그의 인생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향한 투쟁 그 자체였다. 대통령이 된 이후로는 햇볕정책이라 불리는 대북 정책으로 남북 관계 개선에 힘썼다. 2000년 6월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평양에서 남북 정상회담을 열었다. 그 해 12월에는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도 받았다.
외환위기를 빠르게 극복한 것 역시 큰 성과였다. 4~5년은 걸릴 것이라는 외부의 예상을 보기 좋게 깨고, 불과 1년 반 만인 1999년에 IMF의 관리체제에서 벗어났다.
‘정보통신(IT) 강국’이라는 대한민국의 명성이 시작된 것도 이 시기였다. 그는 벤처 산업에 각종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햇볕 속에도 어둠은 있었다. 2000년대 초의 신용카드 대란이 대표적이다. 인위적인 경기 부양을 위해 신용카드 규제를 완화하면서 시작된 사태다. 마구잡이로 남발된 카드로 가계에 빚이 쌓여가며 400만명의 신용불량자가 발생했다. 그 결과 2002년 7.2%였던 우리나라의 경제성장률은 다음 해 2.8%로 곤두박질쳤다.
‘홍삼 트리오’로 불렸던 김 대통령의 아들 삼 형제가 모두 비리에 휘말린 점도 국민의 정부의 어두운 모습이었다.
◇노무현 대통령(16대)-기득권과 싸우다 탄핵의 위기로
뒤를 이어 노무현 대통령이 16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기득권과 싸우고 스스로 권위주의에서 탈피하려 했던 대통령이었다. 국민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소통한 대통령이기도 했다.
그는 새 정부를 ‘참여정부’로 불러달라고 했다. 국민의 참여로 권위주의와 지역주의에서 벗어나고 부패 문화를 청산하겠다는 의지였다. 야심 차게 출발했지만 순탄치만은 않았다. 부동산 가격이 사상 최대 폭으로 치솟고 고성장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빈부 격차가 심화됐다. 특유의 직설적인 표현에 보수 세력이 반발하고 사회 갈등은 증폭됐다.
임기 시작 1년 만인 2004년에는 탄핵의 위기를 맞는다. 국회의원 선거와 관련된 대통령의 발언이 문제였다.
탄핵안은 기각됐지만, 준비한 정책들을 밀어붙일 수 있는 적기를 놓치게 됐다.
임기 후 터진 친인척 비리는 ‘도덕성’을 강조하던 그에게 치명적이었다. 이 문제로 검찰 소환까지 당한 그는 심리적 고통을 이기지 못했고 2009년 5월 23일 사저 뒷산인 봉화산 부엉이바위에서 투신, 서거했다.
◇이명박 대통령(17대)-22조원 들인 녹조라떼
2008년 대한민국의 17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명박 대통령은 ‘경제 살리기’와 ‘국민 대통합’을 강조했다. 평사원에서 대기업의 경영인까지 승승장구했던 그를 국민들은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시켰다. 경제를 살릴 것이란 기대감이 반영된 결과였다.
이명박 대통령은 ‘747’ 공약으로 화답했다. 7% 경제성장과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를 이뤄내고 세계 7대 강국으로 우뚝 서겠다는 의지였다. 결과적으로 그의 공약은 지켜지지 않았다.
‘녹색성장’을 목표로 추진했던 4대강 사업은 아직도 후유증이 크다. 22조원의 국민 세금을 투입했지만, ‘녹조라떼’로 불릴 정도로 수질이 악화된 강만 남았다. 자원외교도 ‘다른 나라가 버린 해외 쓰레기 사업’이나 사들인 전형적인 예산 낭비 사례였다.
◇박근혜 대통령(18대)-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이제는 자연인으로 돌아간 박근혜 18대 대통령에게는 ‘역사상 최초’라는 타이틀이 여럿 붙는다. 대한민국의 첫 여성 대통령이자 아버지 박정희에 이어 딸 박근혜까지 대통령 자리에 오르면서 최초의 부녀 대통령으로 기록됐다.
박근혜 정부 4년은 ‘불통’의 시대였다. 국민들은 물론 소속 정당의 의원들조차 불통의 대상이었다. 유일하게 소통하던 이는 비선 실세인 최순실 씨였다. 민간인 신분인 최 씨는 박근혜 대통령의 호위 하에 국정을 농단하며 마음껏 권력을 휘둘렀다.
결말은 최악이었다. 휘두른 권력은 흔적을 남겼고, 세상에 알려졌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국회 청문회가 진행됐고, 특검이 출범했다. 92일 동안 특검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개입된 많은 이들을 구속하고 진실에 한 발자국씩 다가섰다.
그리고 찾아온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 선고 당일. 헌재는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고 선고했다. ‘8:0’ 헌재 재판관들의 의견은 만장일치였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한민국 역사에 ‘첫 현직 대통령 탄핵’의 주인공이라는 오명을 남기게 됐다.
/정순구·정수현기자 soon9@sedaily.com
일러스트=구선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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