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초 드라마 ‘선덕여왕’(2009), ‘나쁜 남자’(2010) 속 상남자의 강렬한 카리스마부터 영화 ‘해적: 바다로 간 산적’(2014), ‘판도라’(2016) 속 템포 조절을 할 줄 아는 리더십을 거친 김남길. 이번 ‘어느날’에서는 아내를 잃은 남자 강수 역을 통해 심연 가득 차오른 슬픔을 연기했다.
최근 서울경제스타와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김남길은 앞선 수식과는 또 다른 매력으로 취재진을 맞았다. ‘말’과 ‘대화’를 좋아하는 사람. 상대의 작은 행동 하나도 곧바로 캐치해 진심의 배려를 건네는 따뜻함, 더러는 농담으로 친숙함이 가득한 배우였다. 김남길은 인터뷰 내내 기자들의 빠른 워딩 속도에 신기해하며 “손목 아프시겠다. 팔을 좀 풀면서 작업하라”고 걱정 어린 배려를 전했다. 그만큼 그의 ‘말’에는 봄처럼, 강수처럼 따스함이 묻어난다. 어쩌면 14년차 배우의 여유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번 영화 ‘어느날’을 통한 이윤기 감독과 김남길의 만남은 전혀 예상치 못한 신선한 조합니다. 그간 ‘멋진 하루’, ‘여자, 정혜’, ‘남과 여’로 감성 연출에 두각을 드러낸 이윤기 감독은 ‘어느날’로 첫 판타지 감성 드라마를 선보였다. 감독 특유의 정통 멜로가 아닌, 두 남녀의 교감으로 인한 위로와 치유의 메시지를 전한다. 아직 감성 장르를 보인 적 없는 김남길이 이윤기 감독과 함께한 사실은 실로 흥미롭다.
“이윤기 감독님 영화가 그동안 함축성이 있었는데, ‘어느날’은 소재가 가볍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그게 비교적 쉽게 풀어져서 고무적으로는 맞는 것 같아요. 아마 이번에는 이윤기 감독님 영화 중 가장 대중적일 것 같아요. 시나리오가 감독님이 쓴 것 같지 않다고 느껴질 정도로 색달랐어요.”
그 역시 이윤기 감독의 모든 작품을 봐온 관객 중 한 사람으로서 ‘어느날’이 남녀 간의 일반적인 멜로로 그려질 줄 알았단다. 관객들 역시 남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 영화를 놓고 이윤기 감독이 연출했다는 정보로 지금까지와 유사한 로맨스와 멜로를 기대할 수 있겠다. 하지만 영화는 철저히 남자 강수와 여자 미소의 정신적 교감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부분에 김남길은 고심했고, 결국 끌렸다.
“영화에 대한 강박증이랄까요. 영화는 묵직하고 사실적인 걸 많이 다뤄야한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어느날’에서 장치적인 요소로 ‘판타지’가 들어간다는 점이 고민이었어요. 강수의 아픔이 공감은 됐지만, 어떻게 표현할지가 고민이었죠. 이 영화는 ‘어른 동화’같은 느낌이 있었어요. 특별한 계기가 있던 것도 아닌데 시간이 지나고서 보니까 유독 그 때 당시 강수가 가진 아픔들이 더 와 닿더라고요. 제가 느낀 정서를 관객들께 전달하고 싶었어요. 이윤기 감독님이 이걸 어떻게 풀지에 대한 기대치도 있었고요.”
사실 지난달 30일 언론배급시사회 당시 김남길과 천우희는 “‘어느날’의 시나리오를 받고 가장 처음에는 출연을 고사하기도 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만큼 영화에서는 강수가 미소의 영혼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이끌어간다는 판타지 요소가 장치적으로나 배우들의 연기적으로나 까다로운 부분이었다. 하지만 영화의 완성본은 김남길과 천우희의 심도 깊은 연기력과 이윤기 감독 특유의 짙은 감성이 결합돼 아름다운 판타지 드라마로 완성됐다.
“요즘은 이야기에 힘이 있는 작품에 많이 이끌리게 되더라고요. ‘어느날’에서는 각자 하나씩 말하고 싶지 않은 비밀을 가지고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아픔을 용기 있게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지에 대한 영화예요. 결국 ‘아픔’과 사람이 가진 상실에 대한 이야기, 그에 따른 폐곡을 그리죠. 강수라는 캐릭터를 찾아봤을 때, ‘상처받은 치유제’라는 설명이 있더라고요. 자기 연민과 아픔을 강수와 미소가 서로 배려하면서 아우르고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어느날’은 아내가 죽고 희망을 잃은 채 살아가다, 어느 날 혼수상태에 빠진 여자의 영혼을 보게 된 남자 강수(김남길)와 뜻밖의 사고로 영혼이 되어 세상을 처음 보게 된 여자 미소(천우희)가 서로 만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극 중 김남길은 두 달 전 아내를 잃고 실의에 빠진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보험회사 과장 강수 역을 맡아 한 교통사고 현장 조사를 나서고, 병원에서 식물인간으로 누워있는 미소의 영혼을 유일하게 보게 된 후 특별한 인연을 형성해간다.
김남길과 천우희의 만남은 그 자체로 신선하게 다가온다. 두 배우 모두 지금껏 강렬한 캐릭터로 깊은 인상을 남겨왔기 때문에 ‘어느날’을 통한 이들의 서정적인 변신은 관객들의 호기심을 유발하기에 충분했다. 김남길과 천우희의 조합은 기대만큼이나, 어쩌면 그 이상으로 시너지를 발휘했다. 김남길이 표현한 강수의 아픔과 천우희가 연기한 미소의 발랄함, 사랑스러움은 두 배우의 기존 이미지와 180도 다른 연기변신으로 새롭게 시도됐음에도 전혀 이질감 없이 결국 ‘힐링’을 전달한다. 김남길은 실제 천우희와의 첫 호흡에 ‘놀라운 발견’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천)우희 씨도 고민을 하고 있던 차에 제가 먼저 캐스팅 됐고, 출연을 결심했다고 하더라고요. 천만 영화들도 많지만 의미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런 배고픔이 많았던 시기였죠. 이런 영화가 잘 돼서 더 많은 힘을 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우희 씨와 호흡도 맞춰보고 싶었는데 연기 센스도 좋고 공동 작업에 대한 이미지가 좋았어요. 배우들이 이기적이어야 할 때도 있는데, 배려를 많이 해주시더라고요. 어릴 수도 있는 나이에 본인이 중심을 잘 잡고 있다고 생각해요.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배우예요.”우희와는 형제 같은 느낌이에요. 촬영장에 트레이닝 복을 입고오던데 그 모습이 저와 비슷해서 낯설지가 않더라고요. 우희 키가 작아서 제가 안 보이는 척 놀리기도 했는데,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대단했어요. 센스가 좋아서 합도 잘 맞았죠.”
영화에서는 유일하게 홀로 미소의 영혼을 대하는 강수이기에 타인의 시선에서 강수의 원맨쇼를 보는 듯한 연출 장면도 흥미롭게 담겼다. 이에 정작 김남길은 “닭살이었다”며 살짝 얼굴을 붉혔다.
“의구심을 가지지 말자하고 찍었는데 혼자 촬영한 걸 보니까 너무 오버스럽더라고요. 미세한 차이인데, 그 부분을 담백하게 덤덤하게 연기하려 했어요. 연기하며 민망해하면 안 되는데, 혼자 닭살이 돋더라고요.(웃음)
극 중 강수가 아내를 잃은 상실감을 드러내는 방법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홀로 남겨진 집 안에서 김치를 꺼내 먹다가 눈물 흘리는 것. ‘김치’ 하나에도 그녀와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데 아무런 기억도 없다는 듯 일상을 흘려보낼 수 없었던 강수는 그동안 쌓인 내면의 아픔이 결국 그렇게 폭발한다.
“김치를 꺼내먹는 장면이 강수라는 캐릭터가 감정이 터질 때고, 그 정도가 최선의 울음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어요. 울어서 속이 시원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 저는 부러워요. ‘판도라’랑 ‘어느날’처럼 작품 촬영할 때만 거의 울어봤어요.”
대부분의 한국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실제 김남길은 슬픔의 감정을 대체로 노출하지 않는다고. 대한민국에 자리한 강박관념 때문인데, 그렇게 내재된 감정이 어쩌면 강수의 눈물을 더욱 호소력 있게 전달하는지도 모른다.
“저도 혼자 삭이는 편이에요. 내가 가진 아픔으로 주변에 민폐를 주고 싶지 않아요. 긍정적인 편이죠. 제가 잘 안 울어요. 그래서 답답한 거 같기도 해요. 한국남자들이 대부분 가질 법한 ‘남자는 울면 안 돼’라는 주입식 교육이 있잖아요. 왠지 울면 발가벗겨진 느낌이에요. 드라마나 동물 이야기 찾아보며 우는 정도죠. 다른 스트레스는 별 거 없어요. 사람들과 이야기 많이 하고 풀어요.”
실제 김남길이 쌓인 감정을 해소시키는 방법으로는 ‘대화’를 우선으로 꼽았다. 그래서인지 인터뷰 내내 핑퐁(주고받는 호흡)이 끊이지 않았다. 실제 친구를 만나 편하게 수다를 떠는 것만 같은 편안한 분위기가 매력적인 배우다. 그런 그가 일상에서 주로 수다를 떠는 상대는 엄마라고. “장남이기도 하고 지금도 부모님과 같이 살아요. 제가 하도 얘기를 많이 하니까 엄마가 이제는 형식상 들어주는 거 같기도 해요.(웃음) 제가 말이 많은 편이에요. 집에 딸이 없으니까 엄마 입장에서 많이 이해하려 해요. 어릴 때부터 그래서 습관이 된 거 같아요.”
김남길은 좋은 배우이자 좋은 남자, 좋은 아들의 매력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스크린으로 보인 ‘상남자’ 면모로 그를 판단하는 것은 큰 오류다. 그런 복합적인 모습이 현재까지 차근차근 손색없는 변신을 가능케 한 것은 아닐까. 다양한 감정을 아우를 줄 아는 김남길이 스스로 전망한 모습은 이렇다.
“데뷔 전에도 공연을 하긴 했어요. ‘어느날’ 촬영 하면서 드는 생각이, 정서를 잘 대변하는 배우가 되고 싶더라고요. 앞으로 영화계에서도 세대교체가 될 수도 있는데, 세대차이가 나는 건 시대적 환경이 다르기 때문일 거 아니에요. 그런 감성을 다 아우를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옛날보다 힘을 좀 빼고 깊어진 연기가 이제는 자신 있어요. 한편으론 겁이 나기도 해요. 예전과 달라질 수 없다면 어쩌지 걱정하기도 하고요. 지금은 제 나이를 연기하고 싶어요. 지금 제 나이에서 낼 수 있는 감성과 정서, 문화가 그 시대를 대변하기도 하잖아요. 지금 시대를 제 나이에 반영할 수 있는 건 참 좋은 일이에요.”
/서경스타 한해선기자 sestar@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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