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놈처럼 열정적으로 하는 게 연기 이다’ 는 의미이다. 그래서 후배들이 연기에 대해 침을 튀며 이야기하면 ‘끄덕 끄덕’ 추임새를 넣으며 들을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6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윤제문은 “지금 와서 생각하면 미친놈이 되는 게 좋은거고, 미친놈처럼 그렇게 열정적으로 연기 하는 게 다가 아닌가? 란 생각이 든다. 다른 말들은 다 쓸 데 없는 잔가지 같은 말들이다. ”고 했다.
최근 세 차례 음주운전 논란으로 자숙의 시기를 거친 후 공식 인터뷰 자리에 오랜만에 나온 윤제문은 그의 말대로 어떤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가 한 말은 이랬다. “죄송한 마음이고, 영화에 미안하고 그런 마음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빠와 딸의 몸이 바뀌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담은 코미디 영화 ‘아빠는 딸’(김형협)에서 윤제문의 미친(?) 연기를 만날 수 있다. 아빠와 딸의 몸이 바뀌는 설정이라 자칫하면 너무 과해 보일 수가 있는데 베테랑 배우답게 균형을 잘 맞췄다. ‘새초롬’ 표정부터 관객을 웃게 만든 윤제문은 디테일 갑, 댄스 킹 수식어를 이끌어 낼 정도였다.
윤제문의 대답은 군더더기가 없이 솔직한 편이다. 본인이 캐릭터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노력한 과정에 대해서도 “포인트나 특징을 잡으려고 했다기보단, 제가 살아오면서 만난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캐릭터를 저도 모르게 머릿 속에 입력 했던 것 같아요 ”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그럴까. 윤제문이 보여주는 17세 여고생 연기는 외모에서 보이는 것 이상을 상상하게 해 드라마적인 재미를 더한다. 최근 언론 시사회 중 기자들의 긍정적인 웃음 소리가 가장 컸던 영화이기도 하다.
17세 여고생 연기에 대한 이해도는 좀 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했다. 시나리오를 받고 고3, 대학생 딸의 행동을 관심있게 지켜 봤다는 그는 “밖에서는 여자애처럼 행동하는지 모르겠지만, 집에서는 편하게 널 부러져 있는 모습을 보면서 머슴애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고 털어놨다.
이어 “촬영하면서 딸들 생각도 많이 하게 됐고, 딸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해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영화 속 부녀처럼 아이들이 고등학생이 될 무렵 대화를 많이 하지 않게 됐다고 말한 윤제문은 “우리 아이들에게 난 말이 별로 없는 무뚝뚝한 아버지이지 않을까”라고 덤덤하게 말했다.
그의 모습도 평범한 대한민국 아버지들과 다르지 않았다. 일에 쫓기다보니 아이들과 같이 지내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것. 그래서 그의 휴대폰 속에는 아이들의 커가는 모습이 찍힌 사진이 많이 없다고 한다. 휴대폰 속 사진을 뒤져보던 윤제문은 “어려운 질문을 하시네요”라며 멋쩍게 웃었지만 아이들에게 못내 미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윤제문에게도 ‘딸 바보’의 모습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는 두 딸들이 꼬마였을 땐 축구도 하고, 목마를 태워주고 공기놀이도 하면서 즐겁게 놀았다고 한다. 특히 아빠가 목마를 태워주는 걸 아이들이 너무 좋아했다고 눈을 빛내고 말할 땐 딸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가득 느껴졌다.
윤제문은 이번 영화에서 화장품 회사 재고처리반의 만년 과장 ‘원상태’로 나온다. 딸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일명 ‘딸 바보’지만 사춘기에 접어든 딸을 대하는 게 마음처럼 쉽지 않다. 실제 윤제문의 모습과 그대로 닮아있다.
“아이들이 소소한 것부터 고민 이야기까지 엄마와만 주로 대화를 하더라. 남자친구가 생긴 것도 엄마에게만 이야기해서, 난 엄마를 통해서 듣고 그런 상황이다. 서운하면서도 미안하더라“
영화 ‘아빠는 딸’을 보고 싶어하는 관객 1순위는 윤제문의 두 딸이다. ‘딸 바보’임에도 딸에게 사랑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서툰 아빠, 그리고 사춘기에 접어들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빠와는 말도 섞기 싫은 딸이 서로의 인생을 대신 살아보며 공감하게 되는 스토리가 이 가족에게 어떤 여운을 남길지 내심 궁금해진다.
특히 윤제문의 둘째 딸은 연기자 지망생이다. 윤제문이 아버지의 인생을 대신 살아보게 된 자신의 딸에게 조언을 한다면 뭐라고 할까. 그는 한마디로 “사막 위에 혼자 있다 생각하고 연기하라”고 말했다.
“자신감 있게 해라. 네 감정이 맞다고 생각하면 눈치 보지 말고 막 해라라고 말 하겠죠. 무엇보다 사막 위에 혼자 있다 생각하고 집중하는 게 중요해요. 남의 눈을 신경 쓰다보면 잘 못하니까요. 그 정도로만 말 할 거 같아요.”
윤제문의 코믹 연기는 능청스럽다기 보다는 정직하고, 팔딱 팔딱 튀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터치감이 일품이다. 어떤 연기를 맡겨도 그 이상을 소화해내는 배우이지만, 그는 “악역이든 코믹이든 연기란 쉬운 연기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쉬운 연기가 있을까요? 사실 쉽게 할 수도 없어요. 배우가 고민을 하면서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하는 거죠. 그런 고민들이 있어야 현장에서 연기가 나오는 거죠. 어떤 게 쉬워서 이 역할을 선택하거나 작품을 하지는 않아요. 굳이 나누자면, 그래도 코믹 연기가 더 어렵긴 해요. (코믹 연기 잘 하시잖아요?)내가 뭘 잘 웃겨요? 알면 잘 하죠”
지난 해 연말 극단 곡목길의 ‘청춘예찬’으로 연극 무대로 돌아온 윤제문은 초연 배우의 연륜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줬다. 특히 세상살이에 나약한 아버지의 감정을 더할 나위 없이 표현해내며 호평을 이끌어냈다.
박근형 연출은 “제문아.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자”란 한 마디로 러브 콜을 보냈고, 윤 배우는 “ 네 형”이라고 답하면서 그렇게 ‘청춘 예찬’ 앙코르 연극 무대에 서게 됐다고 한다.
초연배우 박해일부터 최근 안재홍, 김동원, 이재균 등 배우들까지 다양한 배우들과 호흡을 맞춰 온 윤제문은 “옛날 시절 생각도 많이 나고, 개인적으로 좋았어요.”라고 담백한 소감을 전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고 했다. 초심으로 돌아간 윤제문은 주연 배우로서의 책임감에 대해 조심스러운 입장을 내보였다. 연극 무대에서 다져온 초심은 생각 이상으로 힘이 셌다. 연극 바닥으로 다시 돌아가서 잠시 느슨해진 열정을 제대로 조이고 온 그의 모습에선 ‘미친 연기’의 또 다른 스펙트럼을 기대하게 했다.
“젊었을 땐 그 열정 하나만 가지고 했었는데, 이젠 연기자로서의 욕심 보다 책임감이 더 많이 생겨요. 물론 주연을 하면 재미있죠. 처음부터 끝까지 극을 이끌고 가니까, 배우가 그 리듬에 맞게 딱 끝나는 재미가 있어요. 그런데 그 작품을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도 함께 따르는 게 주연 자리죠. 지금은 주연을 마냥 욕심 부리기보다는 정말 잘해야죠. 조심스럽지만 잘 해 나가겠습니다.”
/서경스타 정다훈기자 sestar@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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