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P 연합’의 주역이자 ‘7인회’ 좌장이었던 김용환(사진) 자유한국당 상임고문이 7일 별세했다. 향년 85세.
박정희 정부의 경제정책을 지휘한 김 고문은 재무부 이재국장과 세정차관보, 농림부 농정차관보를 거쳐 지난 1970년 청와대에 입성했다. 대통령 외자관리담당비서관 시절 김 고문은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특명을 받고 기업의 이자 부담을 크게 줄여주는 ‘사채동결 조치’를 추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박 대통령의 신임을 받아 상공부 차관과 재무부 차관을 역임하고 1973년 대통령 경제담당특별보좌관을 거쳐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으로 발탁됐다.
경제관료로 탄탄대로를 걷던 그는 1980년 신군부의 숙정 대상에 올랐다가 1987년 신민주공화당 정책위의장으로 임명돼 정계로 방향을 틀었다. 이듬해 13대 총선에서 고향인 충남 대천·보령 지역구에서 당선됐고 같은 지역에서 내리 4선을 했다.
김 고문은 자민련 사무총장이었던 1996년 김대중 정부 탄생의 밑거름이 된 DJP 연합을 주도했다. 그는 1996년 11월 김종필 자민련 총재를 대리해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와 독대하며 협상의 문을 열었고 이듬해에도 현 청와대 비서실장인 한광옥 국민회의 부총재와 막후 협상을 이어가 DJ와 JP 간 공조를 이뤄냈다.
정권 창출의 공신 역할을 톡톡히 한 그는 DJ 정권 인수과정에서 비상경제대책위원장을 맡아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 극복에도 기여했다. 그는 모피아의 대부로 불렸다. 모피아는 재무부 출신 인사를 일컫는 말로 재무부(MOF)와 마피아(Mafia)를 합성한 것이다. 김 고문은 재무부 장관 시절 금융정책과장이던 이헌재씨를 금융감독위원장 자리에 앉혀 위기를 극복할 야전사령관의 임무를 맡겼다. 이후 재벌 구조조정과 금융권 대수술이 집행되면서 모피아는 화려하게 부활했다.
김 고문은 1999년 JP가 DJP 연합의 조건이었던 내각제 개헌을 포기한 데 반발해 자민련을 탈당한 후 허화평 전 의원과 함께 한국신당을 창당했다. 이듬해 총선에서 ‘나홀로’ 당선 된 김 고문은 독자 세력화를 포기하고 2001년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2002년 대선에서는 이회창 전 총재의 선대위 공동의장을 맡아 ‘경제 브레인’으로서 정책설계를 담당했다. 당시 노무현 민주당 후보와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의 단일화에 위기감을 느낀 이 전 총재의 참모들은 “JP와 연대를 추진하자”고 제안했으나 김 고문이 “JP를 만나면 내가 떠나겠다”고 반발해 무산된 일화는 지금까지 회자된다.
김 고문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원로그룹인 7인회에서 좌장 역할을 하며 2대에 걸쳐 박 전 대통령 부녀를 돕기도 했다. 그러나 김 고문은 2012년 12월 대선 이후 “최태민 일가를 멀리하라”는 조언을 했다가 박 전 대통령과 사이가 멀어졌다고 한다. 김 고문이 도왔던 박 전 대통령은 현재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으로 서울구치소에 구속된 상태다.
/류호기자 rh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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