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연한 봄이 왔다. 사회에 막 진출해 인생의 봄날을 설계하는 친구들과의 수다도 점점 잦아진다. 옹기종기 모여앉아 새로 만난 이성 친구, 집 인테리어 계약, 회사에서 벌어지는 숱한 에피소드를 주고받다 보면 시간은 잽싸게 흘러간다. 짜릿하고 즐거운, 때로는 불평과 불만을 쏟아내는 대화 속에서 사회 초년생이라는 동질감을 확인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당장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머리를 맞대고 고민에 휩싸이기도 한다. 친구의 소소한 고민을 듣다 보면 얼핏 가벼운 투정 같지만 현실의 부조리한 문제에 뿌리 박혀 있는 경우도 많다. 특히 다니는 직장이 말로만 듣던 약육강식의 정글이라는 사실에 서글퍼진다.
문제는 처음에 가볍게 시작한다.
이제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A씨는 회사에 최대한 잘 적응하기 위해 모든 술자리에 참석해 회사 사람들과 어울린다.
선배들마다 색다른 조언과 관점을 들으며 나름대로 회사에 대한 입체적인 시각을 그리는 A씨.
누가 회사에서 권력을 쥐고 있는지, 누가 누구를 괴롭히고 있는지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동시에 그런 권위자를 둘러싸고 어떤 사람들이 주변에 어울리는지도 점차 알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강자와 잘 어울렸던 B씨가 한 끼 술을 마시자 제안했다.
자신이 요즘 어떤 부분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 누구 때문에 힘든 상황인지를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하려고 노력하던 A씨에게 B씨가 한 마디를 건넸다.
“너는 C 팀장을 어떻게 생각해? 조직은 정치야. 너가 어디 서 있든 누구의 편에는 서야 해”
늘상 회사 생활에 대해 힘든 이야기를 터놓았던 주변 사람들의 말을 통해 회사에 약간의 힘의 불균형이 있다고 들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간단명료하게 들은 건 처음이었다.
무섭고도 독한 말이었다. B씨가 스트레스를 받았던 C팀장은 이상한 사람도 나쁜 사람도 아닌 단순히 자신과 생각이 다를 뿐인 사람이었다.
A씨는 허투루 살지 않은 자신의 경험과 소신을 붙여 B씨의 말에 반박했고 그렇게 자리가 파한 후 B씨는 다시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A씨가 회사 생활을 지속해나가던 어느 날, 또 다시 B씨의 정치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인사철이 끝나자 새로운 팀장이 오고 일도 사람도 좋다고 알려진 새로운 팀원들이 나타났다. B씨는 새로운 팀장에게 갖은 좋은 말들을 하며 함께 어울려 다니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새로운 강자와 친해진 B씨는 모든 스트레스가 없어진 듯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그 본인의 모습에 취해 힘껏 회사 생활을 해 나갔다.
강하고 센 말들을 주로 내뱉으니 주변에선 그를 굳이 건드리지 않았고 그가 톡톡 쏘는 언행이 무서운 후배들은 그를 새로운 강자로 분류한 듯 했다.
그때 조용히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사무실에 앉아 있는 A씨에게 C팀장이 말을 건넸다.
“오늘 밤에 시간 있으면 우리 좋은 곳이나 놀러 갈까?”
잠시 당황한 A씨에게 B씨가 중간에 가로채듯 대화를 이어간다.
“아~ 팀장. 저 분은 우리랑 취향이 좀 달라요. 그냥 저희끼리 가죠. 케미도 중요한데”
A씨는 당황한 듯 등을 돌리며 웃으면서 떠나는 팀장의 뒷모습을 보며 적잖은 상처를 받았다. 잠시나마 팀장이 사람을 제대로 보고 힘을 부릴 줄 알 것이라 헛물을 켰던 본인의 모습이 한심해졌다.
예전에 B씨가 ‘조직 생활은 정치’라며 어깨너머로 힐끗 말했을 때 비합리적이라 느꼈던 말들이 실제 조직에 생생하게 통하고 있다는 사실에 힘도 빠졌다. 물론 직장은 개개인의 생존을 위해 어느 정도의 정치가 필요할 수도 있다고 본다. 하지만 자기와 생각이 다르면 편을 가르고 더 큰 힘에 기대어 약자를 누르는 모습을 본 것 같아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직장에는 B씨 같은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것이 진짜 강자’라는 명언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평소에 묵묵히 자기 일을 하면서도 적절한 배려와 사려로 조직을 움직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어느 날 D선배가 모두가 없는 텅 빈 사무실에서 말을 건넸다. 그는 어떤 한쪽의 줄을 잡는 것도 거부한 채 늘 조용하게 자신의 업무에 집중하는 스타일이다.
“이번에 우리가 추진하는 사업이 앞으로 어떻게 될까? 지금 사드 때문에 중국 수출이 확실히 어려워졌는데 우리 사업에는 별다른 영향이 없을까?”
무미건조한 업무 얘기였다. 하지만 늘 정치적 관계, 엉켜진 관계를 풀어내는 이야기를 들어왔던 A씨는 오랜만에 들어본 상식적인 대화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이게 진짜 대화지. 이게 정말 회사에서 정상적으로 나눠야 할 대화 아닌가’
“회사가 전쟁터라고? 밀어낼 때까지 그만두지 마라. 밖은 지옥이다”
윤태호 작가의 웹툰 ‘미생’에 나오는 명대사다. 홧김에 퇴사한 오과장의 선배는 식당을 차렸다가 퇴직금은 다 말아먹고 빚까지 진 신세로 전락했다. 직장인은 누구나 오과장의 선배처럼 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혹은 가족의 미래를 위해. 위로 올라갈수록 경쟁자가 나가줘야 자신의 생존 확률이 더 높아진다.
강자들일수록 권력 싸움이 더 잦은 이유다. 약자 입장에서는 자칫 ‘고래 싸움에 등 터진’ 새우 신세가 될 수 있다. 살아남으려면 눈치라도 빨라서 줄이라도 잘 서야 한다. 때로는 라인이 없거나 다른 사무실내 동료를 과감히 내치는 용기도 발휘해야 한다. 어른들은 ‘힘을 기르고 힘을 제대로 쓸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하지만 현실에서는 쉽지 않다. 상사와 맞서면서 원칙을 유지하는 ‘미생’ 속의 오과장은 말 그대로 만화 속에서나 가능한 인물이다. ‘미생’에서도 끝내 오과장은 ‘지옥’ 속으로 뛰어들지 않았나.
아직 세상 물정 잘 모르는 A씨는 그래도 소망한다. 많은 이들이 안타깝게 공감한 이 일이 더 이상 반복돼선 안된다고. 열심히 일상을 묵묵히 살아내는 사람들이 비합리적, 감정적 편가르기의 희생자가 되지 않기를. D선배와 같은 직장인이 위로 올라가 조직을 정당하게 이끌어주기를. 회사도 ‘패권 정치가 판을 치면 조직원들도 비전을 잃고 병이 든다’는 조직 원리도 말로만 하지 않고 실천해 주기를.
야외로 나가고 싶지만 미세먼지가 두려워 커피숍에 앉아 친구들과 수다 떠는 A씨의 푸념이다.
/정수현기자 valu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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