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훈기는 지난 14일 서울경제스타 사무실에서 JTBC ‘힘쎈여자 도봉순’ 종영 인터뷰를 진행했다. ‘힘쎈여자 도봉순’ 캐스팅 비하인드부터 지난 20년 동안의 연기 경험까지, 속 깊고 신중한 태도로 하나하나 꺼내놓기 시작했다.
‘힘쎈여자 도봉순’은 선천적으로 어마무시한 괴력을 타고난 도봉순(박보영 분)이 세상 어디에도 본 적 없는 똘끼충만한 안민혁(박형식 분)과 정의감에 불타는 인국두(지수 분)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세 남녀의 힘겨루기 로맨스다. 심훈기는 극중 안민혁의 배다른 형인 안동석 역을 맡았다. 안동석은 유순해 보이는 겉모습을 지녔으나 뒤에서는 동생 안민혁을 협박하던 인물. 심훈기는 이 같은 이중적인 모습을 능숙하게 소화하며 씬스틸러로 활약했다.
안동석의 협박은 안민혁과 도봉순이 가까워지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따라서 안동석은 초반 이야기 흐름의 키를 쥐고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심훈기가 안동석을 만날 수 있던 데에는 본인의 노력이 가장 컸다. 이전까지 여러 작품에서 노력하는 모습을 좋게 본 이형민 PD가 그를 부르게 된 것. 이 PD는 지금껏 코믹하고 가벼운 느낌의 연기를 많이 했던 심훈기에게서 정극과 비슷한 진지한 분위기를 이끌어냈다.
“감독님과 JTBC ‘욱씨남정기’때 미팅을 했었어요. 그 때 좋게 봐주셨는지 이번에 불러주시더라고요. 시놉시스를 보고 갔는데, 사실 안동석이 재벌이라 저랑은 좀 안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건달이나 경찰 쪽으로 해보고 싶다고 말씀 드렸는데 감독님께서 재벌도 잘 어울린다고 해주셔서 의외였죠. 제 연기를 안 봐도 된다고 하셨는데, 제가 그래도 준비해왔으니 보여드리겠다면서 자유연기를 했어요. 둘이서 마주보고 연기를 하고 있으려니 조금 민망해하시대요. 그래도 결국 안동석이라는 역할을 맡게 됐으니 결과가 좋았죠.”
박형식의 형으로 나오는 만큼 두 사람이 붙는 장면이 많았다. 심훈기는 SBS ‘상류사회’에서 박형식의 연기를 보며 ‘능청스럽게 잘하네’ 생각했었다고. 이번에 현장에서 마주치게 되니, 거기에 성격까지 좋았다고 회상했다. 먼저 다가와서 ‘형님 대사 좀 맞춰주세요’라고 살갑게 굴고 스킨십도 많이 했다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극중 두 인물 사이에는 갈등이 있다. 심훈기가 박형식을 협박했고, 이에 따라 다소 껄끄러운 기운이 감돌 수밖에 없었다.
“동석이가 어릴 때 민혁이를 챙겨주기는 했어요. 그런데 막상 배다른 동생에게 재산이 갈 거라고 생각하니까 겁을 줘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어릴 때는 겁만 주면 포기했던 민혁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민혁이가 떨어지지 않으니 동석이는 단순하게 화가 났던 것 같아요. 나중에 동석이가 민혁이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장면에서는 조금 민망하더라고요. 화면을 봤는데, 저는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고 민혁이는 하늘을 보고 한숨을 쉬었잖아요. 그 장면에서 안동석이 조금 불쌍했어요. 연민을 느꼈죠.”
비록 협박이라는 잘못된 잘못을 택했지만, 동석이 명백하게 악한 인물은 아니다.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순간적으로 그른 판단을 했지만 결국 허심탄회하게 미안함을 전한다. 또 백탁(임원희 분)에게 협박을 부탁할 때도 동생이니 다치지는 않게 하라고 조건을 둔다. 심훈기의 말을 빌리면 ‘인간적인 면이 있는’ 사람이다. 심훈기는 안동석을 설명하는 내내 그에게 가진 애정을 드러냈다. 그동안 연기를 하면서, 매 작품을 이러한 마음으로 임했다. 연기 자체가 좋으니 맡은 역할도 좋을 수밖에.
“20년 동안 이 일을 하고 있는데, 가장 큰 원동력은 그냥 카메라 앞에 서는 게 좋다는 거예요. 20대 때는 단역을 많이 했어요. 단역을 할 때는 하루에 3개까지 찍어도 봤어요. 지상파 3사 방송사를 다 돌았죠. 아침에는 택배 지원, 점심에는 재벌 2세, 저녁에는 특공대원이 됐어요. 일주일 중 TV에 안 나오는 날이 없었죠.”
차근차근 단역부터 시작한 그는 SBS ‘식객’(2008)에서 처음으로 조연을 맡았다. 윗사람인 민우(원기준 분)에게 잘 보이려 고군분투하는, 얄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악역이었다. 요리사로 나오는 덕에 칼질 연습도 열심히 했다. 이후 MBC ‘김수로’(2010)를 통해 사극에 도전했다. 주인공 김수로(지성 분)의 오랜 친구이자 조력자인 노두 역을 맡았다. 이번에는 칼을 내려놓고 말고삐를 잡았다. 매일 6시간 이상 승마 연습을 하며 생애 첫 사극을 무사히 마쳤다.
이후에도 그의 존재감은 곳곳에서 빛났다. tvN ‘응답하라 1988’(2015)에서는 이동휘의 형으로 깜짝 등장했으며 조선시대 노비들의 이야기를 그린 JTBC ‘하녀들’(2014)에서는 사당패 출신 노비 용춘으로 활약했다. 그렇게 조금씩, 빠르지는 않지만 단단하게 자신만의 연기 세계를 쌓아갔다. 크게 주목받지 않는 역할일지라도 허투루 여기지 않았다. 아직 연기에 대해 완벽하게 깨닫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연예계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몸소 느끼게 됐다. 물론 연기 실력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바탕이 돼야 할 것은 예의다. 본인 스스로 조금 찢어진 눈이라고 말한 심훈기는 표정 때문에 초반에 혼나기도 했다고. 더욱 오버해서 예의를 차리기로 결심한 것도 이 때문이다.
“예의가 너무 바르다고 뭐라고 할 사람은 없잖아요. 연예계가 넓은 것 같지만 은근히 좁아요. 쓸 수 있는 사람도 한계가 있고 관계자들도 거의 다 아는 사이죠.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니까요. 자기 혼자 뛰어나서 잘 된 배우는 없는 것 같아요. 매니저가 됐든, 감독님이 됐든 분명히 누군가가 옆에서 도와줘야 기회를 얻을 수 있죠. 그래서 늘 자만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주위 사람들에게 예의 바르게 하고 어른들 잘 챙기는 것, 그런 게 기본 아닐까요.”
특히 연극하는 선배들을 보면서 많이 느꼈다. 어찌됐든 이 세계에서 버티면, 그리고 연기를 잘 하면 기회는 분명히 온다. 그렇게 버티기 위해서는 주변 사람들에게 잘하고 스스로 내실을 쌓아야 한다. 공연을 하는데 중요 관계자가 갑자기 보러올 수도 있고, 오디션을 보러 가서 뜻밖의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 평소 관계를 잘 쌓으며 한 눈 팔지 않고 버티는 것. 20년 연기 경력의 심훈기가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이다. 그런 덕에, 이제는 어머니 앞에서도 당당한 아들로 설 수 있다.
“어머니께서 뿌듯해 하시니까 기쁘죠. 저는 6살 때부터 연기자를 꿈꿨어요. 어머니가 성우셨어요. 어릴 때부터 연기자들을 자주 접하다보니 자연스럽게 희망하게 됐죠. 부모님은 사실 제가 무엇을 하든 상관은 별로 안 하셨어요. 다만 제가 어렸을 때부터 배우를 한다고 했으니까, 제 꿈을 이룬 것을 기뻐하시는 것 같아요. 아는 분께 전화 와서 TV에 아들 나왔다는 소리를 들을 때 특히 행복해 하세요.”
연기를 시작한 초반에는 다른 사람의 모습을 모방도 했다. 현재는 어떤 작품을 보고 감정이 좋다는 생각이 들면 본인의 연기에 응용하는 식이다. 연기는 첫째로 자신감이라는 지론을 가진 심훈기는 대사가 랩처럼 나오도록 완벽하게 외워간다고. 늘 철저하게 준비하는 것만이 현장에서 멘붕을 겪지 않는 방법이다. 물론 지금은 많이 성장했고, 연습하는 모습도 달라졌다. 연기 선생님과 지금도 만나지만, 가르침을 받는다기보다는 맞춰가는 느낌이다. 전문 연기 선생님 외에도 현장에서 만난 수많은 선배들에게 연기를 배운다. 그는 특히 지성에게 들은 조언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꼽았다.
“MBC ‘김수로’에 출연했을 때 지성형에게 들은 조언이 아직도 기억나요. ‘카메라가 없다’고 생각을 하면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때는 제가 지금보다 더 긴장했거든요. 지성형은 연기에 대한 몰입감이 대단해요. 정말 열심히, 진지하게 하는 분이기 때문에 지성형 연기를 보면서 ‘아 저렇게 집중해야 하는 구나’하고 배웠죠. 연기는 사실 가짜잖아요. 최대한 자기가 집중을 해서 자연스럽게, 가짜인 것을 들키지 않게 해야죠.”
지성의 진심어린 말을 가슴에 새긴 심훈기는 앞으로 20년, 30년 넘어 더 많은 연기 생활을 이어갈 것이다. 지금까지 숱한 작품에 출연하며 다양한 역할로 변신한 그에게도 아직 하고 싶은 캐릭터는 남아있다. 대부분의 배우들이 열망하듯, 심훈기가 하고 싶은 역도 악역이다. 안동석처럼 금방 꼬리 내리는 악역이 아닌, 정말 잔인한 악역.
“더 악랄한 역을 해보고 싶어요. 서글서글하게 웃으면서도 피도 눈물도 없는 그런 역할이요. 배우들이라면 누구나 악역에 메리트를 느끼지 않을까요. 우선 현실에서는 안 되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잖아요. 그리고 극에서 굉장히 중요한 것을 이끌고 가는 역할이니까요. ‘도봉순’에서는 장미관 씨가 맡은 범인 김장현 역할이죠. ‘달콤한 인생’에서 황정민 선배도 정말 기억에 남아요. 3~4장면만 나왔는데 그 존재감은 무시할 수 없죠.”
악역은 임팩트 있는 역할이지만 그만큼 부담감도 크다. 어설픈 각오로 덤볐다가는 욕을 먹기 십상이다. 그러나 심훈기의 배우로서 꿈을 들어보면, 그의 열망이 충분히 실현가능한 것임을 느낄 수 있다. 단순히 연기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시청자들에게 자연스럽게 인식될 때까지 얼마든지 달릴 준비가 됐기 때문. 어떤 배우가 되고 싶으냐는 다소 상투적인 질문에도, 심훈기는 고두심과 김영애를 예로 들며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모범 배우의 답을 내놓았다.
“정말 이건 목표고 욕심인데요. 그냥 시청자들이 저를 보면 잘한다 혹은 못한다 그렇게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아 심훈기구나’하고 생각하는 거요. 그냥 믿고 보는 배우가 되는 거죠. 예를 들어, 얼마 전에 돌아가신 김영애 선생님이나 고두심 선생님이 연기하시는 걸 보면 ‘정말 잘하신다’고 굳이 말하지 않잖아요. 그냥 그 분들이 연기하는 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우니까요. 그렇게 되는 게 목표고 꿈이죠. 그러기 위해서 어떤 역할이 오든, 크든 작든, 정말 배역 그 자체가 되려고 노력을 많이 할 거예요. 건방지지 않고 진실하게 노력하는 배우가 되겠습니다. 지켜봐주세요.”
/서경스타 양지연기자 sestar@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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