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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정제 자살과 명 멸망…조선과 일본





1644년 4월25일(대통력 3월19일), 중국 베이징 인근 메이산(煤山). 원나라 때 조성된 인공산인 메이산 별궁에서 명나라의 17대 황제가 숭정제(崇禎帝)가 목을 매 죽었다. 향년 33세. 자결하기 전 숭정제는 ‘너희는 하필 황실에서 태어났느냐’며 어린 자식들을 죽였다. 숭정제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것은 이자성(李自成)의 반란군. 가혹한 세금과 잦은 군역(징집)에 대한 농민 반란군에 명나라도 명운을 다했다. 주원장이 건국한지 276년 만이다.

명나라는 부패로 무너졌다. 이자성은 1641년 명군에 포위 당해 죽을 위기를 맞았으나 뇌물을 받고 포위망을 느슨하게 풀어준 장수 덕분에 살아남아 끝내 베이징을 점령하고 숭정제까지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에 대한 평가는 극히 엇갈린다. 아까운 군주라는 긍정론 이면에는 망국을 자초했다는 혹평이 존재한다. 둘 다 근거가 있다. 숭정제는 역참 폐지를 통한 재정 건전화와 서구와의 교역을 통한 과학기술 발달에 힘을 쏟았다. 동시에 실정도 적지 않았다. 의심이 많아 재위 17년 동안 내각원 53명이 갈리고 형부상서 17명, 총독 7명, 순무 11명이 파직되거나 죽었다. 민초 들의 세금 부담과 군사 징집도 갈수록 늘어났다.

결정적인 패착은 명장 원숭환(袁崇煥) 처형. 재정과 군의 기강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명이 후금을 맞아 버틴 것은 문신 출신이지만 북방의 방어를 자임한 원숭관 덕분이었다. 성벽에 의존하는 옹성전(甕城戰)으로 만리장성과 산해관을 굳게 지켰다. 만리장성을 넘지 못한 후금의 군대가 서쪽을 수천㎞를 우회해 베이징을 위협하자 전방의 병력을 끌고 와 숭정제를 구한 것도 원숭관의 군대였다. 백성들에게 인기가 올라가자 숭정제는 시기심에 눈이 멀어 명장 원숭관을 능지처참했다.

명나라의 재정을 맡은 관리들은 연 40만냥이 들어가는 국방비가 아까워 지구전보다 속전속결을 종용한 끝에 반란군과 청(후금)의 군대에 녹아났다. 숭정제는 내복을 너덜너덜할 때까지 입을 만큼 역대 중국 황제 가운데 가장 검소했지만 재물 욕심은 많았다. 이자성의 반란군이 베이징을 점령했을 때 국고는 은 40만냥으로 텅 빈 상태였으나 황실 내탕금은 차고 넘쳤다. 숭정제의 개인재산은 은 3,700만냥, 황금 150만이 넘었다. 숭정제가 은 100만냥만 풀었어도 사직을 지켰을지도 모른다. 명나라 역사에 대한 방대한 저술을 남긴 역사가 담천(談遷 1594~1658)은 숭정제가 네 가지 잘못으로 명의 멸망을 초래했다고 봤다. 인재 등용 실패와 무원칙한 환관 활용, 의사소통 부재와 위선적 대민정책의 남발.

물론 숭정제가 역대 황제들과 다르게 최후까지 노력했으며 반군에 굴복하지 않고 자결했다는 점을 높이 사는 평가도 있다. 가장 비참하게 죽은 중국 황제였기 때문일까. 숭정제는 오랫동안 ‘멸청복명(滅淸復明)’의 상징으로 꼽혔다. 중원을 차지한 만주족의 나라 청 조정은 통 크게 이 문제를 풀었다. 숭정제의 무덤을 찾아내 황제의 예로 다시 장사지내줬다. 백성들에게는 5일 동안 곡을 하라고 시켰다. 정복 왕조이지만 한족을 자극하거나 멸시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옛날 황제에 대한 장례로 내비친 셈이다.



어느 곳보다 숭정제 자살의 영향을 많이 받은 나라는 조선. 숭정제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은 일부 유생들은 벼슬도 마다하고 은둔에 들어갔다. ‘의로운 선비’들은 ‘우리 황제가 붕어하셨다’며 울었다. 대명천지(大明天地))가 사라졌으니 세상과 인연을 끊고 백이숙제처럼 살겠다는 그들은 숭정처사 또는 숭정거사로 불렸다. 조정은 숭정처사를 배출한 가문을 칭찬하고 선비들은 ‘대쪽 같은 기개’를 우러러봤다. 조선은 ‘명이 멸망한 이상 조선이 중화이며 예의 근본’이라는 ‘소중화(小中華) 사상’에 갇혀버렸다.

명이 멸망했어도 여전히 ‘재조지은(再造之恩)의 은혜(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원병 파병)’를 잊지 못한 조선의 식자들은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고 ‘숭정’을 고집했다. 조선은 ‘청의 연호를 쓰지 않는다’는 청나라의 사신들의 힐책을 받으면서도 명나라를 잊지 못했다. 실리를 추구한다(實事求是)는 실학의 대표적인 학자인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 첫 편 ‘도강록(渡江錄)’에서 연도를 ‘후삼경자(後三庚子)’라고 썼다. 숭정제가 즉위한 날로부터 세 번째 경자년, 즉 정조 4년(1780년)이라는 뜻이다. 대한제국이 멸망한 1910년에도 조선 유생들은 융희 4년이라는 독자연호 대신 숭정 301년으로 표기했다.

인조가 청나라의 군대에 당했던 삼전도의 굴욕에도 움직이지 않던 유생들이 숭정제의 죽음에 통곡하던 무렵, 일본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 일본 주자학의 시조로 평가되는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1618~1682년)는 제자들을 불러놓고 물었다. ‘만약 공자를 대장, 맹자를 참모장으로 삼는 중국의 군대가 일본에 쳐들어온다면 우리는 유생으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제자들이 ‘너무 어렵다’며 머뭇거릴 때 야마자키는 명료하게 말했다. ‘마땅히 칼을 갈고 갑주를 걸쳐 말을 타고 전장에 나가 공자와 맹자를 사로잡아 일본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 이게 바로 공맹의 가르침이며 유생의 도리다.’

조선의 유학은 일본보다 수준이 깊었을까. 관념의 세계에서는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자기 정체성에 대한 생각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한쪽은 중국 왕이 죽었다고 산에 들어가고 한쪽은 나라를 위해 상대가 공자와 맹자라도 싸워서 사로잡아야 한다는 17세기 중반의 인식 차이가 근대 이후 한국과 일본의 명암을 갈랐을지도 모른다. 명나라와 의리를 골수에 새긴 조상들은 옛날 얘기가 아니다. 명(明)이 미(美)로 바뀌었을 뿐이다.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올가미도 ‘종북(從北)’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살아있다. 지긋지긋한 사대(事大)와 굴신(屈身)은 언제나 없어질까.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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