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린 함께 가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망해도 같이 망하는 겁니다.”
황량한 무대에 덩그러니 놓인 칠판. 무대에 오른 5명의 배우들 모두 표정이 절박하다. ‘맨오브라만차’ ‘지킬앤하이드’ 등 대극장 뮤지컬 무대에만 줄곧 섰던 이영미가 분필을 들었다. 극의 설정대로라면 이들은 극단 ‘죽이 되던 밥이 되던’의 배우들. 갑자기 들어온 작품 제작 요청에 그야말로 작품을 급조한다. 공모자는 관객들. 14일 초연에선 장르가 막장 스릴러, 제목은 ‘바람직한 고아원’, 주인공은 순간이동 능력을 가졌으며 해적왕을 꿈꾸는 19세 청년 민소희다. 주요 대사와 제목, PPL 등을 모두 관객들이 정하다 보니 이야기가 점점 산으로 간다. 짓궂은 관객들이 자꾸만 어려운 설정을 보태는 탓이다. 분필로 써내려간 극의 얼개가 칠판을 메우고 드디어 극이 시작된다.
난처한 표정을 짓던 배우들의 연기는 본격적으로 즉흥극이 시작되면서 반전을 이어간다. 어설픈 설정에도 이야기는 기승전결의 구조를 갖추고 그 사이사이를 완성도 높은 음악이 메운다. 가사는 매일 조금씩 수정하지만 노래의 멜로디가 정해져 있는 탓에 뮤지컬로서 최소한의 완성도는 갖추고 시작하는 셈이다. 특히 극의 설정상 연출이 무대에서 직접 배우들에게 연기를 지시할 수 있어(실제 극의 공동 연출을 맡은 김태형 연출과 민준호 연출이 번갈아 가며 출연한다) 이야기가 허무맹랑해지는 것을 막는다.
상연시간 90분을 어떻게 채울지 막막했던 것은 관객들도 마찬가지. 그러나 웃고 떠드는 사이 어느새 이야기가 결말에 이른다.
각본대로 연기하고 노래하는 여느 뮤지컬보다 완성도는 떨어지지만 이 작품의 특별한 점은 오늘 만든 작품은 오늘 이후 더이상 볼 수 없다는 점이다. 배우들도 이렇게 노래한다. “오늘 만든 이 얘긴 내일 다신 못 봐. 이야기 잘 간직해요. 우리도 잘 간직할 게요. 좀 이상하면 어때. 좀 황당하면 어때. 우리 모두가 인생의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수 있지. 다시 오지 않을 우리 인생처럼. 이야기 잘 간직해요.”
이 작품은 배우 이영미, 박정표, 홍우진, 이정수, 김슬기, 정다희가 배우 역할로 출연해 매회 즉흥극을 펼친다. 주인공은 그날 연출 마음이다. 김태형 연출은 “나를 연극·뮤지컬계로 이끈 것은 관객석에서 느껴지는 에너지였다”며 “앞으로도 관객을 중심에 두는 극의 실험을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5월14일까지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3관.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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