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은 지금처럼 한국 진보정권, 미국 보수정권 간의 정상회담이었다. 하지만 회담 결과는 최악이었다. 다음달로 예상되는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반면교사로 당시 상황을 살펴본다.
2000년 남한과 북한, 그리고 미국은 관계개선의 최고의 황금기였다. 1999년 9월15일 발표된 페리 프로세스에 따라 북한은 핵·미사일 개발을 중단하고 미국은 북미 관계 정상화의 가속페달을 밟았다. 2000년 6월 13일부터 15일까지 평양에서 진행된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은 이 같은 화해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그 결과 그해 10월 23일부터 25일까지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회담하고 북미 정상회담을 열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며칠 후인 11월7일 열린 미 대선에서 공화당의 조시 W 부시 후보가 당선되면서 이 모든 화해 열기는 냉각되기 시작했다. 클린턴 미 대통령의 방북 계획도 취소됐다.
2001년 1월20일 취임한 부시 대통령은 ABC(Anything But Clinton)의 기조 아래 전임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 화해 정책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당시 햇볕정책을 정력적으로 추진하던 김대중 대통령이 애가 탔다. 당시 외교부 차관이었던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증언. “조지 W 부시가 당선됐을 때 김 대통령은 아주 불안해 했습니다. 부시 행정부가 대북 관계와 정책을 그대로 이어가주길 간절히 바랐죠.”(톰 플레이트 ‘반기문과의 대화’) 그래서 김 대통령은 조기 한미 정상회담을 추진했다.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 기조가 완성되기 전에 부시 대통령과 만나 자신의 햇볕정책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고자 했다.
그래서 부시 취임 닷새 뒤인 2001년 1월25일 두 정상은 전화통화를 갖고 가능한 한 빨리 정상회담을 갖기로 합의했다. 그러면서 김 대통령은 부시에게 (전임 클린턴 대통령처럼) 햇볕정책에 함께하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부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당시 부시 옆에 있던 전 대북특사 찰스 프리처드의 증언. “김 대통령이 햇볕정책을 말하기 시작하자 부시 대통령은 전화기의 송화구를 막으면서 ‘이자가 누구야? 이렇게 순진하다니 믿을 수 없군’ 이라고 말했다”(찰스 프리처드 ‘실패한 외교’)
40일 뒤인 3월 열린 한미 정상회담 결과도 반기문 전 총장의 표현을 빌리면 ‘재앙’이었다. 부시는 공동기자회견 자리에서 “북한의 문제는 투명성”이라며 “(북핵 동결과 미사일 발사 중단) 협정을 준수한다고 어떻게 믿느냐”고 말했다. 뉴욕타임스는 ‘북한 포용의 꿈에 된서리’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부시 대통령이 북한과 당분간 미사일 협상을 재개할 생각이 없다고 김 대통령에게 말했다”며 “이는 김 대통령에 대한 명백한 퇴짜”라고 보도했다. 설상가상으로 부시 대통령이 회견 중 자신의 아버지뻘인 김대중 대통령에게 ‘이 양반(this man)’이라고 말했다고 해서 큰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 후 부시 대통령은 북한과의 대화 재개를 선언했으나 이는 우리 정부의 적극적인 설득에 대한 최소한의 반응이었고 실질적인 관계 개선 의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 뒤 9·11테러가 발생하고 다음해인 2002년 초 부시 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으로 비난하면서 화해 국면은 완전히 사라졌다. /안의식기자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