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5표 대 102표. 157년 전(1860년) 이맘때 치러진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 당내 경선 결과다. 102표를 얻은 2위는 에이브러햄 링컨. 중앙무대 경력이라고는 하원의원을 한 번 지낸 ‘시골 변호사’ 출신이었다. 이름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경선 시작과 함께 ‘정직함’이 각인되며 선풍을 일으켰다. 그래도 결과는 1위와 차이가 많이 나는 2위에 머물렀다. 1위는 173.5표를 얻은 윌리엄 수어드((William Seward: 1801.5.16~1872.10.10). 지명도와 경력에서 링컨과 비할 바가 아니었던 수어드는 1위를 차지하고도 결선 투표를 치러야 했다. 과반인 233표에는 모자랐기 때문이다.
승부는 3차 결선투표에서야 갈렸다. 2차 결선투표에서 수어드에게 근접한 링컨은 3차 결선투표에서 역전승을 거뒀다. 수어드는 승복하고 링컨의 유세를 도왔다. 특히 링컨의 이름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뉴욕을 비롯한 동부지역에서는 캠페인을 떠맡았다. 대통령에 당선된 링컨은 수어드를 삼고초려 끝에 국무장관으로 모셔왔다. 주변에서는 반대가 많았다. ‘링컨은 수어드의 꼭두각시가 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왔다. 수어드 역시 처음에는 링컨을 우습게 여겼다. 제멋대로 결정하다 대통령에게 제지 당해 사표를 낸 적도 있다. 링컨은 수어드의 집으로 찾아가 설득하고 결국 그들은 황금 콤비가 됐다.
수어드가 모두 69명에 이르는 역대 미국 국무장관 중에서도 특별히 기억되는 첫 번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링컨의 리더십(leadership)을 보좌한 수어드의 파트너십(partnership). 대통령감으로 손색이 없는 정치인의 화합 속에 미국은 분단의 위기를 넘고 노예해방이라는 가치를 보편화시켰다. 링컨도 측근이 없지 않았지만 내각을 경쟁자로 꾸렸다. 초대 내각의 장관 7명 가운데 4명은 공화당 당내 경선의 경쟁자였으며 3명은 야당인 민주당 출신이었다. 링컨은 전임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뷰캐넌은 무조건 충성하는 측근 위주로 내각을 채우고 남부 위주의 정책을 펼쳐 연방 분열 위기를 증폭시켰다.
수어드가 역대 최고의 국무장관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두 가지 더 있다. ‘알래스카 매입’의 주역이자 미국 팽창주의의 초기 주역이다. 우선 알래스카 매입을 보자. 수어드를 비롯한 팽창주의자들은 새 영토 확보에 관심을 기울였으나 노예제도에 막힌 상태였다. 새 영토에 노예제 적용 여부를 놓고 남부와 북부가 대립하며 결국 영토 확보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남북전쟁에서 남부가 패해 이런 장벽이 없어진 직후인 1867년, 수어드는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720만 달러에 사들였다.
한반도 면적의 7배에 달하는 땅을 1에이커(약 1,224평)당 2센트씩 720만달러에 사들이자 여론은 ‘수어드의 바보짓’이라고 비난했다. 알래스카는 ‘수어드의 얼음상자’라고 불렸다. 그럴 만 했다. 미국의 재정여건이 어려웠으니까. 남부와 북부를 합쳐 전쟁 채무가 약 30억 달러에 이르는 가운데 남부 재건에 막대한 비용이 들어갔다. 정책 우선순위도 서부 개발에 있었다. 수어드는 의회를 설득해 매입을 성사시켰다(일부 자료에는 상원에서 1표 차이로 통과됐다고 나오지만 상원 표결 결과는 37대 2이었다).
알래스카 매입이 바보짓이 아니라는 사실은 30년 후부터 밝혀졌다. 거대한 금광이 발견되고 철광석과 석유와 가스, 석탄의 존재가 잇따라 알려졌다. 미국은 이미 알래스카 매입 비용의 수천배가 넘는 자원을 뽑아 썼다. 러시아는 배 아픈 일이지만 당시에는 무리한 선택이 아니었다. 지구촌 곳곳에서 영국과 경쟁하던 러시아는 알래스카를 방위하기 어려운 곳으로 여겼다. 크림전쟁(1853~1856)으로 재정난이 가중된데다, 1860년 중국에게 블라디보스토크 항구를 얻고 나서는 알래스카의 전략적 가치가 떨어진다고 여겼다. 미국에 매각할 경우 영국을 견제하는 효과도 있었다. 요즘에야 ‘헐값에 넘겼다’고 하지만 당시 협상팀은 알렉산더 Ⅱ세에 공로를 인정받아 보너스까지 받았다.
국무장관 수어드는 알래스카뿐 아니라 다른 영토도 노렸다. 알래스카 매입 직후에는 태평양 한복판의 환초 미드웨이섬을 점령해 눌러앉았다. 서인도제도의 덴마크령 버진 아일랜드도 750만 달러에 매입하기로 약속했으나 의회 비준에 실패에 무산됐다. 미국은 1917년 이를 매입하며 2,500만 달러를 냈다. 멕시코의 맥시밀리언 황제가 처형(1867)된 것도 프랑스의 영향력 약화를 노렸던 수어드의 정책과 무관하지 않다. 수어드는 왜 외부 확장에 나섰을까. 미국의 번영이 해외무역 성공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상원의원 시절인 1845년에는 의회 연설에서 미국 의회가 알래스카부터 남미 남단에서 파견하는 대표로 구성되기를 바란다는 연설을 남겼다.
보다 구체적으로 수어드는 상업 제국주의를 꿈꿨다. 의원 시절부터 국내 산업보호를 위한 고관세 정책과 대륙횡단철도 및 중남미 운하 건설 필요성을 주창했다. 뉴욕 주지사 때에는 기업인들과 함께 중국 진출을 모색한 적도 있다. 수어드는 국내 산업 보호 육성을 위한 고율 관세를 적용하고 이민을 통한 값싼 노동력 확보 정책을 펼쳤다.
시인이기도 했던 수어드는 국무장관 시절 이런 시도 남겼다. ‘하나 된 관심으로 뭉친 우리나라가 축복받기를/안정된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나머지 전 세계를 지배하리라//우리 제국은 널리 나라 밖으로 어떤 한계도 모르리라/끝없이 퍼져가는 바다처럼 흐르리라.’ 차상철 충남대 사학과 교수의 연구논문 ’윌리엄 시워드와 미국의 팽창주의‘에 따르면 수워드는 제프리 초서와 스펜서 허버트, 토마스 칼라일, 에드먼드 버크의 세계관에 크게 영향받았다. 백인 우월주의자이거나 사회적 다윈주의자, 보수 논객들에게 사상적 세례를 받아 미국 팽창주의로 발전시킨 셈이다.
수어드는 캐나다와 멕시코가 미국에 점차적으로 편입되기를 바랐다. 알래스카를 사들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수어드의 희망 사항은 망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미 대륙 전체와 태평양, 그린란드까지 포함하는 거대한 제국은 국경선만 존재할 뿐 초강대국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 수어드는 상업의 힘으로 달성하기 원한 반면 오늘날의 미국은 경제력보다는 군사력을 앞세우고 있다는 점만 다르다. 수어드는 수집가들에게도 대박의 상징이다. 그의 초상화가 들어간 1891년 발행 50달러짜리 미국 국채는 희소가치 때문에 경매시장에서 5만 달러를 호가한다고.
수워드가 추진한 팽창주의는 그의 사후 더욱 맹렬하게 타올랐다. 강력한 해군을 보유한 국가만이 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내용의 ‘해양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을 지은 알프레드 머핸과 미국의 대외 팽창을 적극 추진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헨리 캐봇 로지 등이 수어드의 직계 후배들이다. 수워드의 팽창주의는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다. 그가 펼쳤던 모든 정책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도 맥락이 같다. 트럼프의 방어적이고 배타적인 이민 정책 역시 외형만 수어드와 다를 뿐, 미국 제일주의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수어드는 미국을 읽는 키워드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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