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0년 5월 24일 독일 슈트랄준트. 10여 년 전쟁 끝에 평화조약 하나가 맺어졌다. 패배자인 덴마크가 승자에게 안전 항행을 보장하며 무역과 어획권 등 특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주요 요새를 넘겨주고 15년 동안 배상금 지불도 약속했다. 덴마크의 왕위 계승에 승자가 개입할 수 있는 길도 터줬다. 발트해의 떠오르던 강자인 덴마크를 탈탈 턴 승자는 누구일까. 상인들이었다. 국가나 왕, 제후가 아닌 상인. 중개 무역과 어업을 영위하던 상인 집단, 한자동맹(Hanseatic League)이었다.
한자동맹이 뭐길래 한 국가를 상대로 전쟁을 치르고 불평등조약까지 강요했을까. 독일을 중심으로 스웨덴과 덴마크, 지금의 러시아 지역에 퍼져 있던 상업도시들의 연합체였다. 적을 때는 55개, 많을 때는 83개 대도시가 연합하며 무역과 관련한 각종 이권을 따냈다. 한자동맹 구성원들은 스스로 ‘독일 로마제국의 조합 상인’이라고 여겼다. 유럽 유일의 황제 국가였으나 중앙의 통제력은 물론 제후국과 도시 국가 간 정치적 결속이 강하지 않은 신성로마제국이었으나 도시끼리의 상업적 네트워크는 점차 강해졌다. 한자동맹의 소속 도시들은 외국의 거점 도시까지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며 세력을 키웠다. 독일기사단까지 한자동맹에 들어왔다.
강력한 군주가 나타나 억눌러도 끝까지 저항하며 싸웠다. 덴마크와 상권을 둘러싼 이해 다툼도 연혁을 따지면 150여 년 전인 1227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북독일 도시들은 덴마크와 전쟁에서 두 차례 패배했지만 끝내 이기고 말았다. 경제가 급성장한 덕분이다. 농업 발달과 인구 증가, 아시아와의 중계 무역으로 부를 늘려가던 북부 독일 상업도시들의 주력 사업은 청어잡이. 배가 다니기 어려울 정도로 바다를 메웠다는 청어를 잡고 가공하며 유통하는 모든 과정에서 막대한 이익을 거뒀다.
유럽 전체가 가톨릭 아니면 그리스 정교를 믿던 시절, 육식이 금지된 사순절 금식 기간과 육류 공급이 어려운 겨울철의 대체 단백질 공급원이었기 때문이다. 상인들의 근거지인 도시를 방어하는 수비대를 비롯한 군대의 비상식량으로도 청어가 필요했다. 청어잡이와 염장(鹽藏·salting) 가공, 무역은 전후방 사업도 키웠다. 어선과 무역선을 건조하는 조선업과 소금 생산업, 운반 상자를 만드는 목재산업까지 덩달아 호황을 누렸다. 한자동맹의 상인들은 청어를 판 대금으로 영국산 양모와 플랑드르의 모직 제품, 스웨덴과 러시아 지역의 목재, 함부르크의 맥주를 사서 다른 지역에 팔았다. 강한 국가였던 덴마크와 전쟁해 이길 수 있었던 비결이 여기서 나왔다. 막강한 재력.
슈트랄준트 평화조약은 부유한 상인들의 연합 정도로만 인식되던 한자동맹이 정치적으로도 강력한 세력이라는 사실을 유럽 각국에 인식시켰다. 무역 의존도가 높지 않았던 프랑스를 제외한 북유럽 국가들의 한자동맹과 무역은 더욱 늘어났다. 한자동맹은 영국과 벨기에, 스웨덴, 러시아 지역 등에 상관을 설치하고 배타적인 특권을 누렸다. 슈트랄준트 조약 체결 100년 뒤인 1470년에는 런던 주재 한자 상관(스틸 야드) 특권 취소 여부를 둘러싸고 영국과 전쟁에 들어갔다. 한자동맹은 약 4년 동안 간헐적으로 진행된 영국과 전쟁에서도 이겨 각종 특권을 지켰다.
문제는 바로 이 시기가 한자동맹의 정점이었다는 사실. 정치적으로 위세를 떨쳤으나 오히려 위기가 찾아왔다. 여러 요인이 한꺼번에 작용했다. 먼저 네덜란드와 영국의 모험 상인들이 한자동맹의 영역을 잠식해 들어왔다. 모직 제품을 제조하거나 양모를 생산하는 산업국가였던 네덜란드와 영국은 낮은 금리로 자금을 조달하고 새로운 형태의 선박을 싸게 건조하며 한자동맹의 상권을 파고들었다. 한자동맹도 초심을 잃었다. 누구와도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에 점점 고압적으로 변해갔다.
자유무역을 선호하던 한자동맹의 주요 도시국가들은 우위를 확인하고는 보호무역으로 방향을 틀었다. 1434년부터는 외국인 선주에게 각종 장벽을 쌓았다. 새로 건조된 배의 판매는 물론 빌리는 용선(傭船)을 금지하고 모든 한자 상인의 외국인 소유선에 대한 상품 적재도 막았다. 생산 기반이 없는 중개무역상 집단인 한자 상인들의 배타적 해운 정책에 신흥 네덜란드나 영국도 보복에 나서며 자국 상선대를 꾸렸다. 결국 한자동맹은 제 발을 찍은 꼴이 되고 말았다.
보다 결정적으로 두 가지 요인이 한자동맹의 앞길을 막았다. 먼저 종교전쟁. 신교와 구교로 나뉘어 독일 전역을 피로 물들였던 30년 전쟁이 쇠퇴를 앞당겼다. 종교 이데올로기에 경제가 녹아난 셈이다. 풍요의 원천이던 어족 자원도 갑자기 사라졌다. ‘왕 청어’의 산란지가 14세기 말부터 갑작스레 발트해에서 북해로 바뀐 것. 네덜란드가 거대 제국 스페인과 80년 전쟁 끝에 독립을 쟁취한 원동력도 청어잡이를 비롯한 무역의 힘에서 나왔다. 더욱이 네덜란드에서는 각종 혁신이 잇따랐다. 자금도 어느 곳도 싸게 조달할 수 있었다. 어부 ‘빌렘 벤켈소어’가 개발한 청어 처리법과 통절임법은 청어 보관기간을 크게 늘리며 한자동맹에 대한 우위를 다졌다.
결국 한자동맹은 네덜란드와 영국에 밀리며 17세기 후반 이후 급속하게 자취를 감췄다. 유럽을 양분했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처럼 독일 한자동맹의 핵심 도시들도 19세기 중후반에는 ‘국민국가’에 묻혔다. 역사 속에서 사라졌지만 산업혁명 이전까지 북유럽 최대 호황을 이끌었다는 한자동맹이 남긴 흔적은 적지 않다. 자본가를 뜻하는 ‘부르주아(bourgeois)’ 개념이 한자동맹에서 처음 나왔다. 춥고 음습한데다 사방이 적에게 둘러싸인 북독일의 척박한 환경. 어렵게 사업을 시작해 모은 재산을 지키려 상인들은 성(城)을 쌓았다. 독일어로 성벽을 뜻하는 ‘부르크’는 이런 유래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중세에 ‘성안에 거주하는 사람’은 근대 이후 ‘자본가’가 됐다.
한자동맹이 낳은 흔적이 아직도 살아있는 부문도 있다. 자국에서 건조된 배에, 자국산 물품을 싣고, 자국인 선원이 운항하는 선박에게만 연안무역권을 부여한 미국 존스법(Jones Act)의 원조가 한자동맹의 배타적 해운 규칙이다. 산업혁명 이래 발전을 이끌었던 나라들의 발전 과정에도 한자동맹에 대한 반성이 깔려 있다. 중개 무역에만 의존하다 사라진 한자동맹과 이렇다 할 국내 제조업 기반이 없었던 네덜란드의 반짝 호황 이래 각국은 제조업과 해운업, 무역의 삼각체계를 중시하는 정책을 펼쳐왔다. 영국이 그랬고, 미국이 그랬다. 일본이 그랬고 중국도 따라 하고 있다. 한국만 반대다. 최근 2년 동안 제조업과 무역의 축인 조선산업이 흔들리고 해운업의 한 어깨가 무너졌다. 한자동맹처럼 시대의 흐름을 못 읽은 것인지, 무능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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