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종영한 ‘역적’은 허균의 소설 속 도인 ‘홍길동’이 아닌 1500년대 연산군 시대에 실존했던 인물 ‘홍길동’을 재조명한 드라마. 폭력의 시대를 살아낸 인간 홍길동의 삶과 사랑, 투쟁의 역사를 다뤘다. 김지석은 극 중 조선 10대 임금 연산 역을 맡았다. 날이 갈수록 잔혹해지는 폭군의 모습을 강렬한 감정 연기로 표현해내며 시청자들의 호평을 얻었다.
“연산이라는 인물 자체가 혼란스럽고 외롭잖아요. 감정 기복도 심하고요. 그러다 보니 많이 힘들었어요. 왜 연산이 이렇게까지 잔인해 졌을까에 중점을 둔 드라마였거든요. 연산의 19살부터 죽을 때까지를 긴 호흡으로 보여드리면서 저도 점진적으로 변해갔죠. 그래서 더 많이 역할에 빠졌던 것 같아요.”
실제 김지석은 연산과 매우 다르다. 결핍으로 자란 연산과 달리 사랑도 많이 받고 화목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김지석이 플러스라면 연산은 마이너스. 극과 극을 오가야했기 때문에 스스로를 가학적으로 푸시했다고. 일부러 사람도 잘 안 만나고, 외롭게 지냈다. 웃음도 많고 다정한 김지석이 어떻게 연산을 만나게 됐을까.
“그렇지 않아도, 감독님께 제일 여쭤보고 싶었던 거였어요. 도대체 저를 왜? 싶었죠. ‘추노’에서 저를 보고 찾으셨는데 그때는 제가 군대에 있었어요. 제대 후에 촬영한 ‘또! 오해영’도 보셨대요. 명랑함과 쾌활함 속에서 웃고 있는데 웃는 것 같지 않은 느낌을 받으셨다고, 저를 비틀어주고 싶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그런 비틀림을 받은 적이 없거든요. 제발 좀 비틀어달라고 부탁드렸죠(웃음).”
김진만 PD의 선구안은 탁월했다. 그는 김지석의 내면에서 어두운 연산을 끌어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지금껏 다른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연산을 만들어내려 했다. 폭정을 한 연산은 잘 알려져 있지만 왜 그렇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잘 다루어지지 않았다. ‘역적’에서는 정치인 연산을 그려내고자 했다. 무오사화, 갑자사화 등을 연산이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이라고 가닥을 잡았다.
“제가 그린 연산은 막연하게 어머니를 잃은 개인적인 감정에 치우쳐서 광기에 사로잡힌 게 아니었어요. 시대를 잘못 만난 왕이라고 할 수 있죠. 왕권을 건립하고 싶었는데, 대신들과 이데올로기가 맞지 않았던 거예요. 길동이는 민초의 대표였고, 저는 그 반대였으니 계속 대립한 거죠. 하늬씨가 맡은 녹수도 마찬가지였어요. 악인으로만 알려져 있던 인물들을 재해석하는데 심혈을 기울였죠.”
새로운 연산을 완벽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본격적인 촬영에 돌입하기 전부터 이것저것 준비 했다. 그야말로 경건하고 치열한 과정이었다. 다이어트도 했고, 부모님과 연락도 잘 하지 않았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일차원적으로 가장 먼저 한 노력이었다. 이후 연산에 대한 책을 읽었다. 일반적인 역사책이 아니라, 연산을 심리학적으로 해석한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본인을 연산에 맞추기보다는, 해석한 것을 바탕으로 연산을 저에게 입히려고 했다. 그랬기에 연산 그 자체가 될 수 있었다.
“연산이 왜 이렇게 됐을까 축약을 해봤어요. 사랑과 인정을 못 받아서 그랬더라고요. 그 맥락이 저랑 비슷하다고 느꼈어요. 배우는 대중에게 사랑을 받고 인정을 받아야 하는 직업이잖아요. 그걸 충족하지 못하면 삐뚤어지는 길을 가게 되는 거예요. 나를 미워하고, 건강하지 못한 삶을 살게 되죠. 사랑받고 인정받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알지 못했던 저의 모습을 연산이라는 거울로 보게 된 거죠.”
누구보다 긍정적으로 살아온 것처럼 보이는 김지석이지만, 나름의 고민은 있었다. 김지석은 특정 이미지에 갇히는 게 싫었다. 마냥 부드럽고, 사람 좋아 보이는 그런 이미지…. 여기서 김지석이 연산을 ‘인생캐릭터’라고 칭하는 이유가 드러난다. 연산이라는 역할로 인해 대중에게 색다른 김지석을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지석이 저런 연기도 해? 저런 눈빛이 있었어?’라고 새로워하시는 것을 보고 카타르시스와 만족감을 느꼈어요. 제가 작품을 통해 만들어온 이미지를 탈피하고 싶었거든요. 그렇게 정해진 이미지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워지면 더 다양한 것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요. 다행히도 ‘역적’을 통해 다른 면모를 보여드렸고, 거기에 만족을 느낍니다.”
매 작품마다 타인이 되기 위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김지석은 스스로를 탐구하는 것을 포기했다. 김지석의 부모님은 심리학 전공자. ‘네가 너를 잘 알아야 남도 연기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고는 한다. 그러나 김지석은 “아직은 제가 저를 잘 몰라야 될 것 같다”고 소신을 드러냈다. 자신을 잘 알면 알수록 오히려 수로에 빠질 것 같다는 게 이유다.
“나한테 이런 모습도 있었나? 내가 이런 것도 할 수 있었나? 하면서 의외성을 극대화하는 게 아직은 더 좋아요.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고, 내가 잘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버리면 그게 아닌 다른 것을 도전할 때 겁이 날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제 식성을 잘 아는데 일부러 다른 나라 음식에 도전 하겠어요? 안 하지. 저도 아직 저를 모르니까 막 해볼 수 있는 거죠.”
‘역적’이라는 새로운 음식에 도전했던 김지석은 다음에도 신선한 맛을 보고 싶다고 마무리했다. 이번 연산처럼 시청자들이 기대하지 않았던, 허를 찌르는 역할이나 작품이 고프다고. 십 수 년 동안 작품 활동을 하면서 느낀 바가 있다. 많은 작품을 해도, 결국 사람들은 자기가 기억하는 작품만 기억한다. 연기 스펙트럼을 넓힌다는 것은 배우 활동을 하면서 따라오는 성취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
“예전에는 드라마 2개 하면 영화 1개 해야지 생각했어요. 이제는 그런 게 없어졌어요. 사람들이 좋아하고 많이 보는 작품, 그 안에서 제가 제일 잘 해낼 수 있는 역할을 하면 되는 거예요. 시청자들에게 화두를 던지는 작품을 하면 충분한 거죠. 좋은 작품에서 좋은 연기를 하고 좋은 메시지를 남길 수만 있다면, 앞으로도 주연이든 조연이든 상관없이 임할 생각입니다.”
/서경스타 양지연기자 sestar@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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