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주식 시장은 물론 모든 금융 시스템이 붕괴하기 시작한다. 패닉에 빠진 투자자들이 은행, 거래소, 현금 인출기로 몰리지만 어느 곳 하나 돈을 내주지 않는다. 자산운용사는 유가증권을 매도하지 못하게 되고 은행에 묶인 자금에는 마이너스 금리가 부과된다. 문제는 이 같은 시장 붕괴가 전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직접적인 원인조차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처럼 잿빛 SF 영화에나 나올법한 비관론이 현실화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 미국 정부기관과 주요 금융회사, 헤지펀드에서 35년간 활동해온 베테랑 금융전문가이자 경제예측가인 제임스 리카즈다. ‘커런시 워’ ‘화폐의 몰락’ ‘금의 귀환’ 등의 저서를 통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부터 미국 달러화가 몰락하고 있으며 금 보유량에 따라 세계 질서가 재편될 것이라고 주장했던 인물이다.
리카즈는 신간 ‘은행이 멈추는 날(the road to ruin)’에서 앞으로 다가올 글로벌 금융시장의 붕괴는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위기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1998년·2008년 처방 후유증
역대급 금융 지진 초임계상태
모든 투자자 패자로 만들 것”
‘화폐의 몰락’의 리카즈 경고
저자는 이미 2008년을 기점으로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는 국제 통화 시스템은 종말을 고했다고 보고 있다. 2016년 6월 브렉시트 투표 이후 보여준 시장의 충격에서 그는 이미 기준통화나 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입증됐다고 주장한다. 이를 대체하는 금융 체제는 세계 통화(특별인출권), 세계 공통의 조세제도, 글로벌 파워 엘리트 지배 등 세 가지로 요약된다. 리카즈는 “새로운 시스템은 투명성이 부족하고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며 몇 안 되는 글로벌 엘리트의 완전한 합의에 따라 비밀리에 계획되고 슬며시 구축된 그랜드 바겐(빅딜)”이라고 주장한다. 무엇보다 그랜드 바겐의 마지막 단계는 전 세계 국가 채무의 실질 비용을 상각하기 위한 인플레이션 유발이다. 이마저도 실패한다면 국제통화기금이 특별인출권을 대량 발행하고 동시에 각국 정부가 자산유동화를 철저하게 막아 모든 투자자를 패자로 만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특히 1998년과 2008년의 위기를 들며 당시의 극약 처방이 후유증을 남겼고 언제든지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금융 지진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정확한 시기를 밝히지 않았지만 그는 현재 자본시장이 결정적 사건 하나가 연쇄 반응을 일으켜 파괴적 결말을 낳을 수 있는 초임계상태에 있다고 보고 있다. 위기의 재료는 늘 같다. 눈사태를 예고하는 첫 번째 눈덩이는 주요 은행이 실물 금을 인도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금 파생금융상품 거래를 뒷받침할 실물 금은 갈수록 비축량이 줄고 있다. 문서 상의 공급량과 실물 금의 총량의 차이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얘기다. 두 번째 눈덩이는 달러 부족이다. 이는 미국이 전 세계에 달러 공급을 지속할 능력에 한계가 왔다는 의미다. 이외에도 국채를 포함한 대규모 채권부도, 중국의 신용위기, 극심한 디플레이션 등은 앞으로 닥쳐올 위기의 전조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금·땅·미술품 등에 자산 분산
현물 보유 비중 높여라” 충고도
그렇다면 금융 붕괴 속에서도 개인 투자자들이 자산을 지키려면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할까. 저자가 제시하는 포트폴리오는 금과 은 10%, 현금 30%, 부동산 20%, 순수 미술품(아트펀드) 5%, 엔젤투자·초기 단계 벤처캐피탈 10%, 헤지펀드 5%, 채권 10%, 주식 10% 등이다. 핵심은 바로 현금화할 수 있는, 시스템에 묶이지 않은 현물 보유 비중을 높이라는 것, 디플레이션과 인플레이션에 동시 대비하라는 것이다.
리카즈의 주장이 정답이 아닐 수는 있다. 그러나 적어도 ‘사고 실험’에 머문 정통 경제학에 비해 복잡하고 때로는 비합리적인 현실 시장을 중심으로 위험을 분석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정통 경제학이 그의 비판을 새겨들어야 할 이유다.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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