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 억류됐다 17개월 만에 식물인간 상태로 돌아온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 문제로 미국 전체가 분노로 들끓고 있는 가운데 이 문제가 오는 29일(현지시간) 한미 정상회담과 남북 대화 분위기에도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냐는 전망이 나온다. 워싱턴포스트(WP)가 사설에서 “북한이 미국 시민에게 위해를 가한 것에 대해 반드시 벌을 줘야 한다”고 밝히는 등 ‘웜비어 쇼크’를 계기로 북한에 대한 미국의 여론이 대단히 강경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AP 등 미국 언론에 따르면 웜비어의 아버지인 프레드 웜비어씨는 15일(이하 현지시간) 기자회견을 열고 “북한이 내 아들을 다룬 방식에 대해서는 문명국가로서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분개했다. “북한이 아들의 상태를 1년 넘게 비밀로 유지하고 수준 높은 의료를 제공하지 않은 이유를 모르겠다”며 “이런 식으로 감금되고 대우받았다는 사실은 끔찍하다. 그들은 야수처럼 악랄하고 폭력적이었다”고 맹비난했다.
그는 전날 이뤄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전화통화 내용도 공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웜비어의 상태를 물어보고 여전히 의식이 없다는 대답에 슬픔을 표시하고는 “부친도 건강을 잘 챙기라”고 위로했다고 프레드 웜비어씨는 전했다.
미국 의료진은 웜비어가 식중독인 ‘보톨리누스 중독증’에 걸린데다 수면제를 복용해 뇌 손상이 발생했다는 북한 측 주장을 믿지 않고 있다. 웜비어가 입원한 신시네티주립대병원 의료진은 기자회견에서 “웜비어가 보툴리누스 중독증에 걸렸다는 아무런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며 “뇌 조직이 광범위하게 손상됐으며 부상의 원인은 아직 모른다”고 밝혔다. 미국 언론은 웜비어가 지난해 15년의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은 직후 혼수상태가 됐지만 북한이 1년 넘게 이를 숨겼다고 보도해 여론의 분노 수위가 더욱 높아졌다.
이 같은 미국의 분위기에 따라 이달 29일 열리는 한미 정상회담에도 난기류가 흐를 것으로 예상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북한이 추가적인 핵·미사일 실험을 중단하면 조건 없이 대화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아울러 대화의 폭은 북미 관계 정상화까지 넓게 가져갈 생각임을 밝혔다. 북한의 핵 포기가 아닌 동결만으로도 대화에 나선 뒤 한반도 비핵화와 북미 관계 개선이라는 목표로 다가가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문 대통령의 의견에 트럼프 대통령이 어떤 반응을 나타낼지가 관심이다. 미국은 북한에 대해 압박과 관여를 병행하되 최종적으로는 북한과의 대화를 통해 북핵 문제를 풀겠다는 정책 기조를 확정했지만 웜비어 쇼크를 계기로 강경 여론이 불길처럼 퍼져나가고 있어 트럼프 대통령도 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 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의 대북 정책에 이견을 나타낼 수도 있다는 관측이 외교가에서 나온다.
만약 이번 일을 계기로 미국이 북한에 대한 강경 대응 입장을 확정할 경우 남북 대화 무드도 급속 냉각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이번 일은 정치적인 갈등이 아닌 인권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한국도 북한에 대한 미국의 조치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인도적 지원부터 시작해 남북 교류를 전격 재개하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전략이 첫발부터 꼬일 가능성이 커졌다는 외교가의 대체적인 관측이다.
/맹준호·이수민기자 next@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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