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리스너 배우 배유람의 ‘봉인된 시간’
배유람과 안재홍은 건국대 영화과 2기 동기이자, 오랜 절친이다. 거부감 없는 친근한 외모 역시 공통점을 지녔다.
최근 서울경제스타 사옥에서 만난 배우람은 “제 외모를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닌데, 만족하지도 않는다”는 특별한(?) 견해를 내 놓았다.
“내 얼굴에 만족할 때까지 어딘가를 고치고 싶다는 생각은 없어요. 다만 제 스스로 느끼기에 애매한 얼굴이라 마음에 걸려요. 아예 확 잘 생기거나, 아예 확 못생기거나 하는 게 좋지 않나요. 대학교 재학 시절에도 재홍이랑 서로 “우리 좀 더 못 생겨야 하는데” 이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아요.“
최근 안재홍은 KBS 2TV 월화드라마 ‘쌈, 마이웨이’에서 현실 어딘가 존재할 법한 현실 남친 김주만으로 열연 중이다. 배유람은 김주만을 열렬히 응원하는 중.
“재홍이랑 제일 친해요. 물론 재홍이는 날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작품 ‘쌈, 마이웨이’ 가 들어왔을 때도 캐릭터적인 이야기는 물론 대본 리딩도 같이 했어요. 서로 스무살 때부터 알아왔으니까 서로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죠. 한번 통화하면 1시간은 기본일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해요. 재홍이도 드라마에 현실 몰입한 시청자들 반응이 걱정이 되는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나 어떡해?“ 란 말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사실 배유람은 안재홍과 친해지기 전, ‘쟤는 뭐야? 저렇게 생겨서 왜 배우를 하겠다고 하지’ 란 우려 섞인 생각을 했다고 한다. 안재홍 역시 배유람을 보며 같은 생각을 했다고 하니 이보다 더 잘 통할 수 있을까. 그래서 그럴까. 건국대에는 웃픈 전설이 존재한다고 한다. 영화과에 들어온 후배들이 제일 처음 받았던 공식적인 질문은 “배유람과 안재홍 중 누가 더 잘 생겼어?”이다. 차마 대답을 못하는 후배들에겐 “그럼 누가 더 못생겼어?” 란 질문이 날라온다고 한다. 후배들의 투표 결과는 배유람과 안재홍만 아는 비밀로 전해지고 있다.
이렇게 그가 농담을 할 수 있는 이유도 그 누구보다 모교를 사랑하는 선배이기에 가능하다. 그는 건국대 영화과가 내홍을 겪은 현실을 돌아보며, “졸업한 선배들은 다니고 있는 재학생들이 다치는 게 안타깝다”고 했다.
“학과 정원이 줄면 학교 지원금이 줄고, 학교 폭이 좁아지고 수업도 바꿔지고, 받은 수업도 달라지잖아요. 후배들이 받는 스트레스가 걱정이 됩니다. 물신 양면으로 후배들 앞길이 풀릴 수 있게 도와주고 싶었는데 제 힘이 부족해 안타까워요.”
그의 말을 듣고 있다보니, 연기 스승으로 나서도 될 듯 보였다. 하지만 그는 “누구를 가르치는 것엔 소질이 없다”며 손사래를 친다.
“연기 지망생이 가진 원석을 스스로 알아서 잘 깎게 해주는 일이 스승이 해야 할 일인데, 전 아직 그 정도는 아닙니다. 제 주변에 정말 티칭을 잘 하시는 분 많아서 전 엄두도 안 내고 있어요. 전 멘토 정도는 잘 할 자신이 있어요. 멘토로서 연기적인 고민과 경험을 나누는 것과 티칭은 다르잖아요. 누군가 배유람이 교수라면서, 학생들 술만 사주고 있음 어떻게 하니?란 말을 해선 안 되잖아요. 전 좋은 리스너라고 생각해요.”
어린 시절 스포츠 기자가 되고 싶어했던 배유람은 공부만 시키는 학교 교육에 반기를 들고 공부보단 소설책을 주로 읽었다고 한다. 우연한 기회에 연기학원에 견학을 가게 된 배유람은 호기롭게 도전한 연기 시연에서 처참히 깨진 뒤 “완전 하등동물이 된 기분”을 느꼈다고 한다.
“밖에서 볼 땐 대사 외우고 자신 있게 하면 되겠지 했는데, 막상 무대에 올라가보니 다르더나. 정말 창피할 정도로 못했다. 마치 벌거벗은 느낌이었다. 연기란 게 보는 거랑 진짜 다르구나란 생각이 계속 들더라. 그 부끄러움이 카타르시스로 바뀌는 순간이 왔다. 그렇게 연기에 재미가 붙기 시작했다. 처음엔 부모님이 연기자 되는 걸 반대하셨는데, 식음을 전폐하면서 꼭 하겠다고 하니 허락해주셨다.”
7년차 배우 배유람은 그동안 드라마 ‘프로듀사’에선 김수현, 박혁권, 차태현과 호흡을 맞췄고, ‘응팔’에선 박보검, ‘군주’에선 유승호의 측근으로 등장했다. 좋게 보면 유명 배우들과 인연이 많은 배우고, 보다 솔직히 말하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인공이 아닌 주인공 친구 역으로 인상이 각인된 배우다. 배유람 역시 이에 대해 잘 인지하고 있었다.
“평범하게 생기다 보니, 학교 다닐 때도 주인공 친구 역을 많이 했어요. 옆에 있음 부담스럽지 않은 얼굴이죠. 잘 생긴 친구 옆에 놔두면 위화감 들지 않는 인상이잖아요. 주인공 보다 잘 생긴 친구들은 오히려 어중간해서 역할 맡기가 더 힘들어요. 전 그것보단 나은 편이죠. 하하.”
긍정주의자 배유람은 “배우는 일희일비하지 않고 인내해야 하는 직업이다”고 말했다.
“배우에게 필요한 게 선택과 집중인 것 같아요. 선택 앞에서 우린 늘 흔들려요. 하나가 안 풀리면 마음이 지하 끝까지 내려가요. 그러다 또 잘 풀리면 천정을 뚫고 올라가죠. 친한 동생이 있는데 그 친구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어요. 우리가 선택 받는 직업인데, 제발 일희일비하지 말라고. 이러기도 하고 저러기도 하는데 거기에 흔들려선 안 되잖아요. 그러다 돈 들어왔다고 신나서 주변 사람에게 너무 사주려고도 하지 말고, 캐스팅에서 물 먹었다고 너무 마음 아파하지도 말고, 너무 상처받지 말라고요. 그리고 상처를 밖으로 표현하면서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어하지 말았음 해요. 안에서 해결해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가야 길게 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배유람의 봉인된 시간은 늘 ‘행복’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는 타르코프스키 ‘봉인된 시간’의 한 구절인 “우리는 행복을 좇기 때문에 행복하고, 행복을 향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말을 들려줬다.
“행복을 바로 눈 앞에서 잡을 수 있으면 행복할까요. 계속 행복을 향해 나아가는 게 행복한 거죠. 제 인생에 대해 채찍질 하면서 나아갈 수 있어 행복해요. 그러다보면 주변에서 도움을 받기도 하고, 이런 경험들이 합해지면서 행복에 점점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그는 비밀 한 가지를 공개했다. 만족스럽진 않지만 부모님이 낳아주신 얼굴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이 (얼굴)탈을 가지고 있음 온전히 제 연기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이 얼굴을 연기적으로 키우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 얼굴로 살인마, 지질한 남자, 착한 남자 다 할 수 있거든요. 제가 좀 더 연기적으로 무르익으면 ‘유람씨가 그 때는 덜 익었고, 지금은 익어가는 배우라는 뜻’이 무엇인지 제대로 느끼게 해드리고 싶어요.”
연기적으로 무르익은 40대 배유람의 행복한 미래가 궁금하지 않는가.
/서경스타 정다훈기자 sestar@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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