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2년 2월 금융위원회 간부 회의. 김석동 당시 금융위원장은 회의 석상에서 자동차보험료를 직접 언급했다. 그는 “손해보험사들의 경영 개선이 된 만큼 자동차보험료를 인하해야 한다”며 “조만간 업계 자율적으로 이런 노력이 가시화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당시 자동차보험은 제도 개선 효과에 힘입어 실적 부진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추세를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영업 적자의 규모가 줄어들고 있을 뿐 만성 적자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당국의 발언이 떨어지자 손보사들은 향후 실적에 대한 고민 없이 곧바로 액션을 취했다. 금융위 간부 회의 바로 다음 날, 대형사인 삼성화재와 동부화재가 보험료 인하 계획을 내놓았다. 이어 다른 손보사들도 보험료를 2~4%씩 내리겠다는 계획을 줄줄이 발표했다.
금융당국 수장의 발언에 ‘업계 자율’이라는 단어가 포함돼 있기는 했지만 업계의 무더기 보험료 인하 조치를 두고 손보사들의 자율 결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각에서는 대선을 앞두고 정부가 의도적으로 내놓은 서민 표심 잡기용 물가 정책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도 감히 토를 달 수 있는 손보사는 없었다.
어쨌거나 당시 당국은 보험 시장에 그렇게 구두로 개입했고 손보사들은 이의 제기 한 번 못하고 그대로 따랐다. 그 결과 시장은 어떻게 됐을까. 2011년 4,070억원이던 자동차보험 적자는 2012년 6,333억원으로 늘어났다. 이어 2013년에는 7,981억원으로 더 확대됐다. 심지어 2014년과 2015년에는 연간 적자 규모가 1조원을 넘어섰다. 최악의 폭설이 덮쳐도 고급 외제차의 증가로 렌트비와 수리비가 급증해도 당국의 ‘윤허’ 없이는 손보사들이 보험료에 손을 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부 소형 손보사들이 도저히 적자를 감당할 체력이 안 돼 보험료를 소폭 올리기는 했지만 당국의 비공식적 사전 승인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자동차보험료 구두 개입. 이는 보험업계에서 여전히 회자되는 대표적인 관치 금융의 추억이다.
당국이 보험료를 좌지우지하던 분위기는 2015년 10월에 이르러서야 수그러들었다. 당국이 21년 만의 보험산업 규제 완화를 선언하며 ‘보험 선진화 로드맵’을 내놓은 덕분이었다. 로드맵 발표 후 손보사들은 자동차보험료를 자체적으로 올리기도 내리기도 하고 있다. 그 결과 지난해 자동차보험 적자는 3,400억원 수준으로 다시 줄어들었다.
하지만 지난달 정부가 실손의료보험 개입을 선언하면서 보험 업계의 분위기는 어수선해졌다. 실손보험료의 강제 인하와 이로 인한 관련 적자 확대에 대한 걱정 때문만은 아니다. 실손보험을 넘어 자동차보험, 더 나아가 다른 보험 상품들에 이르기까지 당국이 직접 규제하던 시절로 모두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커져서다. 특히 각자도생을 요구하는 IFRS17(새 보험국제회계기준) 도입을 앞두고 상품과 가격에 규제의 족쇄가 다시 채워질 경우 경쟁력 약화는 물론 최악의 경우 문을 닫는 곳까지 나올 것이라는 게 업계의 전망이다. 아직은 설마 모든 것을 되돌리기야 하겠냐는 것이 보험 업계의 조심스러운 분위기다. 설마가 현실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yhchung@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