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친구 머리 좀 봐. 당신도 돈 돌려받으려면 투자해야 할걸.”
밤 늦은 시각, 이모(61)씨의 집 앞 현관에 건장한 체격의 남성 셋이 섰다. 지인 김모(43)씨의 머리엔 선홍색 피가 흘렀다. 자신을 드라마 투자자라고 밝힌 한 남성은 “빨리 계약을 해야 MBC가 편성을 해 줄 텐데 김씨한테 돈이 없다”며 이씨를 재촉했다. 이씨는 드라마 제작비로 이미 1억5,000만원을 빌려줬지만 위협에 못 이겨 다시 3억원 수표를 꺼내 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김씨 머리에 흐르던 피는 인근 도축장에서 잡은 소의 피였고, 서로 채무관계인 것처럼 행세한 김씨 일당은 모두 드라마제작사 관계자였다.
편성에 실패한 드라마를 다시 제작한다고 속이고 역할극을 벌여 지인에게 수억원을 뜯어낸 남성 2명이 징역형을 받았다.
서울서부지법 형사3단독 신영희판사는 드라마제작업체 대표 김모(43)씨와 지인 박모(41)씨에게 각각 징역 2년과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고 9일 밝혔다.
영상제작사 대표인 김씨는 유명 드라마작가가 집필한 추리소설 ‘히든’의 드라마 제작 공동사업에 참여했지만 번번이 드라마 편성에 실패했다. 은행마저 제작비 대출을 거절하자 김씨는 수억원의 제작비를 충당하기 위해 고등학교 동창의 친구 이씨를 만났다. 김씨는 “이 드라마가 나오면 무조건 대박인데 작가에게 줄 계약금이 없어 편성이 늦어지고 있다”며 이씨를 꼬드겨 1억5,000만원을 받아냈다.
한 달 만에 받은 돈이 바닥나자 김씨는 남성 3명을 앞세우고 이씨를 찾았다. 김씨 옆에 선 남성들은 자신을 드라마 투자자라고 밝힌 후 “드라마가 성사되지 않으면 김씨를 죽여버리겠다. 당신이라도 돈을 내라”고 협박했다. 이씨는 의심쩍어하면서도 “드라마가 완성돼야 (이씨가 낸) 원금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말에 3억원을 또 다시 빌려줬다. 김씨 일당은 이에 그치지 않고 2개월 뒤 이씨를 찾아와 “배우를 캐스팅해 놨다. 계약금만 달라”고 속여 3억원을 더 빌려갔다. 이들은 총 7억5,000만원을 송금 받은 후 단 20일 만에 자취를 감췄다.
재판부는 김씨 일당 3명 중 돈을 박씨에게 전부 송금한 1명은 피해자로 분류해, 김씨와 박씨에게 징역형을 선고했다. /신다은기자 downy@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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