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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징병을 거부하다





1863년 7월 13일 오전 10시 30분 뉴욕. 헌병 사령관 집무실로 모여든 500여 군중의 분노가 터졌다. 이미 오전 6시부터 냄비를 두들기는 소음 시위에 나섰던 군중들은 집무실에 돌을 던져 창문을 깨트리고 불까지 질렀다.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때 뉴욕시 주재 헌병 사령관의 집무실에 불을 지른 이유는 징병 반대. 징병 사무소로 사용되던 헌병 사령관 집무실을 1차 목표로 삼았다. 징병 사무소를 불태운 군중은 전신선도 끊었다. 미국 역사상 최대 폭동의 하나로 꼽히는 ‘뉴욕시 징병거부 폭동(New York City draft riots)이 시작된 것이다. 시민들이 폭도로 변한 데에는 여러 요인이 겹쳤다.

무엇보다 뉴욕 시민 대부분은 남부를 상대로 치러지는 연방 정부의 전쟁 자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뉴욕은 북부에 속했어도 남부와 경제적 관계가 깊었다. 면화와 담배 등 남부 농장의 생산품을 유럽으로 내보내는 수출항이었기 때문이다. 부두와 창고 등에서 일하는 아일랜드계 노동자들은 전쟁으로 남부와 경제 교류가 끊기고 일감이 크게 줄자 연방정부에 대한 불만이 쌓였다. 당연히 시장도 집권당인 휘그당(공화)보다 남부에 동정적인 민주당 출신이 당선되는 경우가 많았다. 민주당 소속 뉴욕시장은 징병에 공공연히 반기를 들었다. 시장이 ‘링컨 대통령의 징병 명령은 위헌’이라며 맞서는 상황에서 징병제 강행으로 뉴욕시 전체가 들끓었다.

링컨 대통령이 반발을 예상하면서도 징병 명령을 내린 이유는 병력 부족 탓. 단기전으로 예상했던 내전(남북전쟁)이 길어지며 북군 병사들의 복무기간이 다 찼다. 북부는 당장 병력 30만과 전쟁 자금이 필요했다. 링컨 행정부는 사람과 돈을 동시에 끌어오기 위해 징병제 시행과 더불어 예외 규정을 뒀다. 20세부터 45세까지 백인 남성에게 3년간 군 복무를 의무화하되 부유한 사람들이 빠져나갈 길은 터놨다. 300달러(오늘날 가치 4만 2,700 달러에 해당·미숙련공 임금인상률 기준)를 내고 대신 근무할 사람을 사서 보내는 조건으로 병역을 면제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J.P. 모건을 비롯한 부유층이 이 제도로 병역을 면제받았다

월요일이었던 이날 오전 10시를 기해 징병 사무소를 비롯한 관청과 우체국에 2차 징병 대상자 공고문이 나붙자 마침내 시민들의 불만이 터졌다. 시위대가 주요 기업을 돌 때마다 동참하는 노동자 대열이 불어났다. 각종 엔진을 제작하는 공장의 노동자 400여명이 합세한 군중을 관청과 부자들의 저택에 돈을 던졌다. 불과 나흘 전 1차 징병 대상자 공고문이 발표됐을 때 그저 웅성거리기만 했던 뉴욕 시민들이 이토록 흥분한 데에도 결정적인 이유가 하나 있었다. 일요일 발표된 게티즈버그 전투의 전사자 명단을 본 시민들은 ‘징집은 전사로 직결될 것’이라는 두려움에 떨었다.



개개인의 두려움이 합쳐진 군중의 불만은 쉽게 폭력으로 바뀌었다. 시민들은 징병 사무소와 관청을 파괴하고 불을 놓았다. 화재 진압을 위해 출동한 소방관들도 두들겨 맞았다. 일부 소방관은 아예 화재 진압복을 벗고 시위 군중 대열에 끼었다. 변장하고 현장을 빠져나가려던 경찰서장은 시민들에게 두들겨 맞고 얼굴을 칼로 난자당해 중태에 빠졌다. 16일까지 나흘간 이어진 폭동에 참여한 뉴욕 시민은 연인원 5만 여명. 일부 징병대상자들은 거리에서 경찰 및 출동 군병력과 총격전을 벌이고 관공서와 신문사, 대저택과 호텔, 심지어 고아원과 신교도 교회 2곳 등 건물 50여 채를 태웠다. 폭동 첫날밤에 장대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불길이 도시 전체로 번졌을지도 모른다.

폭동이 한창일 때 군중 틈에서는 ‘남부 만세, 제퍼슨 데이비슨 만세’라는 구호까지 터져 나왔다. 남부동맹과 그 대통령인 제퍼슨 데이비슨을 추종하자는 구호에 놀란 링컨은 최전선의 군 병력까지 불러들여 진압에 나섰다. 전쟁장관(국방장관) 에드윈 스팅턴은 게티즈버그 전선에서 5개 연대의 병력까지 차출해 직접 진압에 나섰다. 뉴욕시 징병거부 폭동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은 뉴욕 시민들의 저항은 영화 소재로도 몇 번 쓰였다.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주연으로 2002년 개봉된 영화 ‘갱스 오브 뉴욕(Gangs of New York )’의 후반부는 아일랜드 출신 하층 백인들의 애환과 뉴욕 징병거부 폭동을 소재로 삼았다.



연방군 4,000여명의 개입으로 폭동은 진압됐어도 상처가 크게 남았다. 무엇보다 인명 피해가 컸다. ‘119~120명 사망에 2,000여명 부상’이라는 정부 발표와 달리 사망자가 2,000명, 부상자가 8,000여명에 달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적어도 400여명은 죽었다는 게 정설로 통한다. 주목할 대목은 사망자의 대부분이 흑인이었었다는 사실. 백인 군중들은 흑인만 보면 사적 린치를 가했다. 집을 태우고 백인 수백 명이 흑인 한 사람을 때리고 짓밟아 죽이며 가로수에 밧줄을 걸고 흑인들을 매달았다.



어렵게 살아가던 백인 하층민들이 흑인을 집중 공격한 이유는 경쟁상대로 여겼던 탓이다. 목화 농장에서 면화를 따던 흑인들이 대거 해방되거나 탈출해 단순 노동에 진출하며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는 피해 의식과 인종적 우월감에 젖어 흑인을 마구잡이로 죽였다. 불탄 고아원도 유색인종 전용 고아원으로 흑인에 대한 백인들의 배려와 아량의 상징물로 꼽히던 시설이었다. 링컨과 연방정부는 하층 백인들이 자행한 흑인 차별과 탄압의 덕을 봤다. 생명에 위험을 느낀 흑인들은 연방정부군에 대거 지원, 병력 부족에 숨통이 트였다. 남북전쟁에서 모두 18만 6,087명의 흑인 장병이 북부를 위해 싸웠다.

거대 도시 뉴욕에서 하층 백인들이 정부에 맞서고 흑인을 공격한 뉴욕시 징병거부 폭동은 154년 전의 흘러간 이야기일 뿐일까. 뉴욕시민들의 징병 폭동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출몰과 잠복을 반복하는 것 같다.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라는 구호 아래 2011년 미국을 뒤흔든 월가 점령 시위는 일자리와 가진 자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징병거부 폭동과 맥을 같이 한다. 하층 백인이 주도하는 폭동은 잘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로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최대 지지기반이 인종적 우월감과 경제적 피해의식에 절은 채 쉽게 흥분하는 미국 하층 백인들이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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