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중형으로 다스리는 경제 범죄가 있다. 무엇일까. 답은 화폐 위·변조 행위. 최초의 종이돈을 선보인 원나라는 지폐 앞면에 ‘위조할 경우 사형에 처한다’는 경고문을 넣었다. 영국에서 마지막으로 처형된 마녀는 ‘화폐 위조범’이었다. 과학자에서 고위직 공무원으로 변신한 아이작 뉴턴 런던 조폐국장은 화폐 위조범을 잡는데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조선도 사사로이 사전(私錢)을 주조하는 행위는 극형에 처했다.
화폐 위조범이 역사에 등장한 것은 기원전 7세기경. ‘기록상 인류 최초의 금속 화폐’라는 ‘엘렉트룸’을 주조한 리디아(Lydia·오늘날 터키 중부) 왕국은 화폐 위조에 골머리를 앓았다. 리디아인들이 위조한 동전을 가려내기 위해 도입한 게 터치스톤(Touchstone). 검은 석영이 포함한 광물로 금을 문지르면 함량을 가려낼 수 있었다. 동아시아권에서는 ‘시금석(試金石)’이라고 불리는 이 광물은 리디아에서 금속화폐가 발명된 직후부터 활용됐다. 화폐 위조의 역사는 화폐의 역사와 거의 동시에 시작됐다는 얘기다.
역사적으로 가장 조직화한 화폐 위조가 일어난 시기는 2차 세계대전. 독일과 일본이 국가 차원에서 위조 화폐를 찍었다. 중일전쟁이 터지자 일본은 중국 경제를 교란하겠다며 중국 돈 40억 위안을 위조해 곳곳에 뿌렸다. 마침 물자 부족과 군대에 지급할 급여조차 구하기 어려운 처지이던 국민당 정부는 오히려 1,890억 위안을 떠 찍어내는 방법으로 일본의 위폐에 맞섰다. 물타기 결과는 초인플레이션의 심화. 전쟁 이전까지 소 두 마리를 살 수 있었던 100위안의 가치가 일본이 항복할 무렵에는 달걀 2개로 떨어졌다.
히틀러의 독일도 진위를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정교한 위조지폐 제조에 나섰다. 처음에는 영국 경제를 교란할 요량이었으나 나중에 독일 정보부서의 공작 자금을 마련할 목적으로 바뀌었다. 독일이 위조지폐 제작 공장을 건설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영국은 1943년 4월, 10파운드 이상 수표 발행을 중단하고 1944년 9월에는 ‘5파운드 이상 지폐를 모두 신권으로 교체하거나 발행을 중단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스웨덴이나 터키 등과 거래에서 들어오는 물품 대금에 섞여서 들어오는 위조 화폐와 수표를 차단하기 위해서다.
히틀러가 위폐를 구상한 시기는 영국 본토에 대한 공습작전이 실패로 끝난 1940년 겨울부터. 유대인 수용소에서 화가와 인쇄기사·전직 은행직원 등 142여 명을 뽑아 대규모 공장을 짓고 1942년 말부터 정교한 위폐를 찍어냈다. 지폐를 바늘로 찔러 위조 여부를 확인하는 영국인들의 습성까지 고려해 위폐를 만들었다. 품질에 따라 네 등급으로 나눠 완성도가 높은 위폐는 주로 대외 무역에 사용됐다. 독일산 위조지폐의 제작 물량은 액면 5파운드에서 50파운드까지 4개 권종에 1억 3,261만 파운드. 여기서 최소한 1.037만 파운드는 공작 자금과 대외 무역 대금 결제에 쓰였다.
영국은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나치 친위대의 크뤼거 베른하르트 소령이 실무책임을 맡아 ‘베른하르트 작전(Operation Bernhard)’으로 불린 히틀러의 위조지폐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기 전, 전쟁이 끝났기 때문이다. 위조지폐 제조에 동원됐던 유대인들도 상대적으로 운이 좋았다. 강제수용소의 가스실에 끌려갔던 다른 유대인들과 달리 이들은 모든 점에서 특별 대우를 받았다. 운동과 취미 활동, 음악회까지 열었다. 위조지폐 중 상당액이 이들 유대인의 손을 거쳐 팔레스타인의 유대계 무장 단체에 전달돼 무기 구매와 유대인 집단 이주와 정착촌 건설에 활용됐다는 분석도 있다.
베른하르트 소령을 비롯한 책임자들은 연합국의 처벌을 받았을까. 그렇지 않다. 베른하르트 소령도 짧게 복역하고 풀려났다(그는 85세 천수를 누렸다.). 위조 화폐 사업의 실무자들도 마찬가지. 연합국 사령부의 심문에도 베른하르트 소령 등은 조금이라도 민감한 질문이 나오면 ‘모르쇠’로 일관했다. 일부 나치 잔당과 극우 세력은 위조지폐 자체를 부인했다. 수용소의 존재와 비밀 공장 운용 등은 원한에 찬 유대인들이 꾸민 거짓말이며 음모라는 주장도 서슴지 않았다.
패전 직전, 나치는 영국 파운드 뿐 아니라 미국 달러화까지 위조에 성공했으나 미군과 소련군의 진주가 임박하자 위폐 제작 원판을 파기하고 남은 위폐는 남모를 장소에 버렸다. 범죄 흔적을 지운 것이다. 하지만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1959년 7월 27일,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위폐를 끈질기게 추적하던 서독 잡지 슈테른지의 기자가 오스트리아 토플리체 호수의 78m 바닥에서 위폐 묶음을 찾아낸 것이다. 슈테른지는 ‘독일의 치부를 드러냈다’는 극우세력의 협박을 받았지만 결국 이겨냈다.
전범 국가인 독일이 국제사회에서 지도력을 인정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반성할 뿐 아니라 불편한 진실을 밝히는데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이 전쟁 중에 위폐를 만들어 살포한 사실마저 부인하는 일본과 달라도 한참 다르다. 일본이 화폐를 매개로 끼친 해악은 또 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당시 조선은행의 화폐발행고는 49억 엔이었으나 불과 보름 사이에 76억 엔으로 뛰었다. ‘종전 대책비’라는 명목 아래 일본인들의 귀환 자금 마련을 위해 마구잡이로 통화를 남발했던 탓이다.
미 군정 체제가 들어서기 전까지 일제의 조선은행이 발권은행이었으니 위법은 아니지만 이로 인해 신생 한국은 해방되자마자 물가고에 빠졌다. 조선은행의 일본인 간부들은 철수가 시작된 후에도 조선 서적인쇄주식회사에 있던 100엔짜리 인쇄 원판을 빼돌려 미 군정청과 조선인 직원 몰래 지폐를 인쇄해 일본인 예금주들에게 몰래 나눠줬다. 불과 며칠 사이에 100엔권 발행이 두 배로 늘어났다. 35년간 국권을 강탈하고 자원을 수탈한 것도 모자랐는지 마지막 떠나는 순간까지 일제는 한국에 피해를 끼쳤다. 일본인들의 불법과 탈법으로 해방된 한국의 경제는 물가고에 시달렸다. 제목의 물음으로 마침을 대신한다. 위조지폐…독일과 일본, 누가 더 나쁠까.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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