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박범신 작가의 마흔 세 번째 장편소설 ‘유리(流離)’가 대만에서 먼저 출간됐다. 지난해 10월 국내 출간이 예정됐으나 작가의 성추문 논란으로 무기한 연기되면서 대만 최대 문학출판사인 잉크(INK)를 통해 먼저 번역·출간된 것이다. 당시 많은 독자들이 박 작가의 책이 중국이나 영미권도 아닌, 대만에서 먼저 출간된 것을 두고 의아하다는 반응이었다. 앞서 이문열, 정유정, 황석영, 김진명 등 국내 대표작가들의 소설이 대만에 소개됐지만 대만 소설이 국내에는 거의 소개되지 않은 데다 인구 2,300만에 불과한 대만 출판 시장은 여전히 생소하다. 그러나 대만은 15억 인구의 중화권 진출을 위한 관문으로 전 세계 출판계가 주목하고 있는 시장이다. 국내 출판계 역시 10여 년 전부터 만화, 아동서 등을 중심으로 진출하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한류 열풍을 바탕으로 드라마 관련 에세이나 주요 소설들의 번역·출간이 이어지고 있으나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여전히 미흡하다는 지적이 많다.
본지는 대만의 문화 진흥을 위한 민관협력과 국제교류를 이끄는 중화문화총회(中華文化總會·GACC)의 린진창(林錦昌) 사무총장과 대만 최대 문학출판사인 INK출판을 이끌며 국내 소설을 대만 시장에 주로 소개하고 있는 초안민(初安民) 사장을 초청해 27일 서울 사간동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의실에서 양국 출판 교류 확대와 발전 방안을 주제로 좌담을 진행했다. 사회는 아시아태평양출판협회(APPA) 회장 등을 역임하며 한국-대만 출판 교류의 가교 역할을 한 양원석 알에치코리아 대표가 맡았다.
“한국 책 계약금은 미국이나 일본의 5배 이상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기사단장 죽이기’의 판권 가격이 단적인 예가 될 수 있겠네요. 한국은 200만달러 수준이라고 들었는데 대만은 40만달러였습니다. 양국 시장 규모를 고려해도 지나친 고가죠. 다양한 책을 대만에 선보여 물꼬를 터야 하는 시기인데 지금 같은 고비용 구조면 선택이 뻔할 수밖에 없습니다.”(초안민)
“일본은 단교 이후에도 꾸준한 민간 교류를 통해 일본 서적을 선보이며 대만 시장에 공을 들여왔습니다. 반대로 한국은 1992년 국교 단절 후 민간 교류마저 끊었죠. 지금이라도 민간차원의 문화교류를 재개해야 합니다.”(린진창)
“사드 배치 후폭풍으로 한류 콘텐츠의 중국 수출이 막히면서 대안 시장으로서 대만이 부상했지만 금한령이 일단락된 이후에도 관심을 지속시키려면 양국 교류가 좀 더 전략적으로, 긴밀하게 이뤄질 필요가 있습니다.”(양원석)
최근 2년간 대만 관광이 급격하게 늘었으나 국내에선 여전히 대만 역사나 문화에 대한 관심이 저조하다. 그러나 이미 전세계가 15억명 중화권 독자에게 다가가기 위한 교두보로서 대만 출판 시장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매년 2월 열리는 대만 타이베이 도서전이 세계 5위급 규모의 도서전으로 자리 잡은 배경도 여기 있다.
대만 출판시장의 강점은 다양성과 개성이다. 초 사장은 “문화대혁명 시기를 거치며 중국 본토의 문학은 경직됐고, 오히려 퇴보한 반면 대만은 중국어를 가장 잘 보존하고 활용한 나라로 자리잡았다”며 “중국은 물론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가 따라올 수 없는 광범위한 주제의 책이 쏟아지는 탓에 대만에서 인기를 끈 콘텐츠는 반드시 중국에서도 성공한다”면서 중화권 진출의 테스트베드로서 대만 시장의 강점을 들었다. 린 사무총장 역시 “중국 본토의 여러 성에서 건너온 생활양식과 대만 원주민의 문화가 공존하며 다원주의가 자리잡았다”고 소개했다.
대만은 특히 1980년대 수십 년 이어온 계엄령이 해제되면서 통제돼온 정치적인 이슈에 대한 논의도 자유롭게 발전했다. 중국 지도부의 내막을 폭로하는 서적 등을 파는 홍콩 최대의 금서 서점이었던 코즈웨이베이가 서점 관계자들의 강제 연행·구금으로 문을 닫은 이후 대만 타이베이에서 서점 재개장을 준비 중이라는 점이 단적인 예다.
지난해 말을 기점으로 중국이 한류 문화 수출을 막는 이른바 금한령을 실시하면서 당시 대만, 홍콩 등 한류가 힘을 발휘하고 있는 중화권 시장에 대한 국내 문화계의 관심이 커졌다. 그러나 대부분이 단기적 접근으로 금한령 기간 중국을 대체할 시장 정도로만 판단하는 한계를 보였다. 양 사장은 “올 1·4분기에만 음악, 영상 등 한류 콘텐츠 관련 서비스 수지 흑자 규모가 4분의 1 가까이 줄었다”며 “앞서 대만 등 대안 시장을 마련해뒀다면 피해 규모를 줄일 수 있었을텐데 지금도 주요 대안시장으로서 대만에 대한 스터디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은 안타깝다”고 꼬집었다. 그는 또 “금한령이 일단락된 이후에도 관심이 지속되려면 전략적인 교류 프로그램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범신의 ‘유리’에 앞서, 정유정의 ‘7년의 밤’ 황석영 ‘오래된 정원’ 등 국내 대표 작가들의 소설이 대만 시장에 소개됐지만 아직 독자 반응이나, 작품 다양성 측면에서도 일본 소설을 따라갈 수가 없다. 지금은 다양한 작품을 쏟아내며 대만 독자들의 입맛에 맞는 소재와 주제를 찾아가고 번역의 수준도 끌어올려야 할 시기지만 소개되는 작품이나 작가가 제한적이라는 점은 크나큰 약점이다. 초 사장은 그 이유로 한국 출판의 고비용 구조를 꼽았다. 그는 “한국은 대만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라도 최소 1만 달러를 요구하는 게 보통인데 이는 일본이나 미국보다 5배 이상 높은 것”이라며 “대만 출판사 입장에서도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며 독자 반응을 살펴야 하는데 부담이 너무 크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단교 이후에도 대만 출판시장에 전략적으로 접근했던 일본 사례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추 사장의 표현을 빌자면 “일본 문학사를 대만에서 집필할 수 있을 정도”다. 린 총장은 “단교 직후 일본 출판사들은 거의 공짜 판권을 뿌리며 일본 책들이 대만 시장에 자리잡을 수 있도록 공을 들였다”며 “일본 소설을 다양하게 접하다 보니 마니아층이 생기고 지금까지도 다양한 일본 서적을 소개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됐다는 점은 한국 출판계에도 교훈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중화문화총회는 중화문화 발전과 교류, 국제협력 등을 위해 결성된 민간단체이나 정부가 문화진흥에 앞장선다는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역대 회장직은 총통이 맡고 있다. 현재 회장은 지난해 당선된 차이잉원 총통이다. 정부 관계자, 문인, 출판인 등 정관계 인사와 문화계 인사가 회원으로 있다.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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