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방송되는 KBS1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두 얼굴의 세종 - 1편 세종은 허수아비 왕이었나?’ 편이 전파를 탄다
조선 최고의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 그러나 세종도 처음부터 완벽한 군주는 아니었다?
아버지 태종과 노회한 정치가에 둘러싸여 장인의 죽음 앞에서도 무력했던 세종.
그는 과연 허수아비 왕이었을까?
▲ 무엇이든 아버지에게 묻는 세종
우의정 이원(李原) 등이 계하기를, “지난번에 수재로 인하여 감선(減膳)도 하였고, 이내 어온(御?)도 감량하였으나, 이제 추성(秋成)이 되어 벼농사가 풍성하니, 청하건대, 그전대로 장만하여 올리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앞으로 상왕에게 말씀 드리겠다.” 하였다.
-세종실록, 세종 3년 9월 4일
세자로 책봉된 지 단 두 달 만에 왕이 된 세종. 하지만 군주로서의 길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권력을 가진 상왕인 아버지 태종의 그늘에 가려 국정을 운영해야 했던 22살의 젊은 왕 세종. 실질적인 군사 권력은 여전히 아버지 태종에게 있고, 국정을 볼 때 역시 끊임없이 상왕께 아뢰야 했는데. 세종의 나약한 모습이 드러난 결정적 사건이 벌어진다. 세종 즉위년 겨울 역모 죄로 세종의 장인 심온이 압송된 것이다. 심온의 목숨이 위태로운 그날 밤 아버지 태종과 연회를 즐긴 세종. 장인의 죽음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세종은 정녕 허수아비 왕이었을까?
▲ 태종의 승하, 그러나 여전히 위태로운 성군의 길
<대신이 아뢰기를> “이제(양녕)의 거취(去就)는 신들이 위임 받은 것이니, 전하도 사적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외방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옳으며, 또 효령 대군 이하 종실들도 항상 궐내의 상차에 있을 것이 아니라 각기 사택의 상차로 돌려보내고, 다만 조석전(朝夕奠)에만 참예하도록 하소서.“
-세종실록, 세종 4년 6월 1일
태종의 승하 후, 드디어 단독 군주가 된 세종. 그러나 여전히 넘어야 할 장벽이 있었으니, 바로 아버지 태종의 구신(舊臣)들로 가득한 조정이었다. 조정의 신하들은 세종을 상대로 기선 잡기에 나선다. 폐세자 양녕이 아버지의 상을 다 치르기도 전에 내쫓아내야 한다는 조정 신하들의 상소가 빗발친다. 세종은 결국 양녕을 유배지 이천으로 돌려보내고 만다. 아버지의 권력이 사라진 후에도 기를 펴지 못한 세종. 그는 이대로 신하들의 기선제압을 당하고 말 것인가? 과연 그는 이 난국을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
▲ 세종의 역습, 조선 최대의 노비 뇌물사건을 파헤쳐라!
세종 8년, 판세를 뒤집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권세가들이 뇌물 노비를 받고, 불법으로 노비를 편취할 수 있도록 도왔다는 전말이 드러나게 된 것. 그 배후엔 무려 36명이라는 노비를 뇌물로 받은 당대의 권세가이자 태종의 오른팔이었던 병조판서, 조말생도 있었다. 세종은 철저한 재조사를 통해 17명의 신하들이 132명의 노비를 뇌물로 받은 조선 초 희대의 뇌물사건을 밝혀낸다. 세종은 지난날 허수아비 왕의 모습을 털어버리고 비로소 우리가 기억하는 세종대왕의 얼굴을 찾을 수 있을까? 세종 반격의 전말은 <역사저널 그날>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진=KBS 제공]
/서경스타 전종선기자 jjs7377@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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