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8월 2일 새벽 2시, 이라크군이 쿠웨이트 국경을 넘었다. ‘최정예 공화국 수비대’ 소속 2개 기갑사단과 1개 기계화보병사단, 1개 차량화보병사단 등 4개 사단 10만여 병력은 커다란 저항을 받지 않고 6번 고속도로를 내달렸다. 개전 6시간 만에 수도인 쿠웨이트시티 외곽에 이르렀다. 쿠웨이트는 2개 기갑사단을 보유하는 등 작아도 짜임새 있는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이라크군의 상대가 안 됐다. 병력과 전차, 장갑차, 공군 전투기 등 주요 무기 측면에서 이라크의 50 대 1의 비율로 열세였다. 침공 일주일 만에 산발적인 소규모 저항까지 진압한 이라크는 양국의 합병을 선언하며 ‘쿠웨이트는 이라크의 19번째 주’라고 못 박았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과 합병은 국제적인 반발을 불렀다. 침입 이튿날부터 국제연합(UN) 안전보장이사회는 이라크의 행위를 비난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원상 복귀하라는 성명서를 냈다. 이라크를 옹호하는 국가가 아예 없었다. 이슬람 형제국가들도 침략 행위를 규탄하고 나섰다. 이라크를 그대로 두면 자칫 중동 지역의 정세가 흔들릴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소련마저 반(反) 이라크 정서를 이끄는 미국의 편을 들었다.
세계 경제는 충격에 빠졌다. 뉴욕과 런던, 도쿄 등 주요 금융시장에서 미국 달러화 가치가 폭등하고 국제 원유 가격이 치솟았다. 이라크가 쿠웨이트 국경에 군대를 집결할 때부터 급등세를 타 배럴당 1달러 이상 올랐어도 당시 국제 유가는 배럴당 10달러대 중후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며 배럴당 20달러 선이 바로 깨져 배럴당 23달러까지 넘어섰다.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은 이런 현상을 반겼다. 원유 판매 수입이 증가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후세인은 쿠웨이트 유전까지 장악한 이상 원유 수출 대금이 더욱 많이 들어올 것이라고 믿었다.
후세인은 쿠웨이트 침공을 기획할 때부터 ‘경제’를 최우선으로 쳤다. 전쟁의 명분도 경제적 손실에서 찾았다. 전쟁 발발 보름 전인 7월 17일, 이라크는 아랍연맹 회원국들에 공조하자는 편지를 보냈다. ‘쿠웨이트 등이 쿼터(할당량)를 무시하고 원유 생산과 수출을 극대화하는 통에 국제 유가가 떨어졌으니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쿼터’란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유가 안정을 위해 할당한 산유국별 생산 및 수출량. 이라크는 쿠웨이트와 UAE가 미국의 이익을 위해 쿼터보다 훨씬 많은 원유를 생산해 연초 배럴당 20달러 50센트를 웃돌던 가격이 13달러대로 떨어졌다고 공격했다. 후세인은 이라크가 이로 인해 140억 달러 손실을 보았다며 쿠웨이트에 변상을 요구했다.
다음날인 18일 이라크는 ‘쿠웨이트의 도둑질’을 문제 삼았다. 쿠웨이트 석유업자들이 이라크 유전의 기름을 빼내 손실을 입혔다는 것. 공세를 받은 쿠웨이트는 “이라크의 공세는 채무를 갚지 않겠다는 꼼수”라고 맞섰다. 누구 말이 맞았을까. 둘 다 사실이었다. 박상현 이화여대 교수의 연구논문 ‘후세인의 전쟁 선택 요인에 대한 인식론적 고찰’에 따르면 이라크는 국제 유가가 배럴당 25달러는 되어야 이란과 전쟁에서 진 채무를 갚고 무기를 사들이며 경제를 개발할 수 있었다. OPEC을 통해 유가를 올리려는 이라크의 시도는 번번이 쿠웨이트를 필두로 사우디아라비아, UAE에 의해 막혔다.
더욱이 이라크는 이란과 8년 전쟁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던 상황. 부채가 많지 않던 산유국이던 이라크는 전쟁 종료시 대외 채무만 600억 달러가 넘었다. 전후 복구에도 2,300억 달러가 필요했지만 이라크의 연간 석유판매 대금은 130억 달러 수준에 머물렀다. 고정적인 경상 지출 230억 달러에도 못 미치는 수입액은 또 다른 돈을 빌려야만 해결할 수 있었다. 이라크는 쿠웨이트 등에 “이란의 회교 혁명으로부터 당신들의 왕정을 지키는 대리전을 치렀으니 부채를 탕감해 달라”고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공개적인 편지 공세를 펼친 것이다.
이라크의 요구는 점점 많아졌다. 쿠웨이트와 국경에 군대도 보냈다. 또다시 전쟁이 터질 것으로 우려한 OPEC 회원국들은 이라크의 주장을 일부 수용해 유가를 배럴당 3달러씩 올리기로 합의했다. 이때가 7월 26일. 아랍의 맹주를 자처했던 이집트도 따로 이라크와 쿠웨이트 간 중재에 나섰다. 회담은 잘 풀리는가 싶었다. 쿠웨이트가 일부 양보할 뜻을 비쳤기 때문이다. 쿠웨이트는 이란-이라크 전쟁이 한창일 때 국제적 불문율을 깨고 이라크와 국경지대에 유전을 건설했던 원죄가 있었다. 이라크는 30일 최종협상안으로 쿠웨이트의 도굴로 인한 손해 24억 달러 보상과 채무 100억 달러 탕감, 일부 영토 할양 등을 요구했다. 쿠웨이트는 다 수용해도 영토만큼은 못 준다고 버텼다.
결국 둘은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전쟁으로 번졌다. 쿠웨이트를 합병하면서 이라크는 ‘역사적으로 고유한 영토’라는 주장까지 펼쳤다. 오스만 튀르크 시절 같은 지역이었다는 논리였지만 150여 년 이상 독자 세력을 유지해온 쿠웨이트는 망명정부를 세우고 항전을 이어갔다. 이후의 전개는 익히 아는 대로다. 중동의 패권을 꿈꾸던 이라크는 미국과 두 차례 전쟁에서 졌다. 후세인은 미군에 잡혀 사형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라크의 처지는 예전보다 더 나빠졌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은 자신과 나라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악수 중의 악수였던 셈이다.
잘못된 선택의 책임은 후세인과 그를 지지한 이라크 국민들의 몫이지만 따져 볼 게 남았다. 첫째, 이란-이라크 전쟁의 피해는 온전히 이라크의 몫이었는지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이라크는 이란과 전쟁으로 10만 5,000여 명 사망과 70만 명 부상, 재산 손실 4,526억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 원유 생산 시설이 파괴돼 수출도 전성기보다 75%나 줄었다. 반면 물가는 1988년 이후 369%나 뛰었다. 이라크는 왜 이란과 전쟁에 뛰어들었을까. 답은 일단 미뤄두고 두 번째 문제로 시야를 돌려보자.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은 정말 막기 어려웠을까.
이라크가 편지로 경제적인 억울함을 호소하고 군대를 쿠웨이트 국경에 집결하던 시기에 후세인이 가장 신경 쓴 것은 미국의 태도였다. 7월 25일 후세인은 에이프릴 글래스피 이라크 주재 미국 대사에게 조지 부시 대통령의 언질을 받았다. “부시 행정부는 아랍 국가 사이의 분쟁에 대해 어떤 의견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귀국과 쿠웨이트와 국경 분쟁에 같은 것 말이죠.” 7월 31일, 미 의회 청문회에 나온 국무성 차관 존 캘리는 ‘만일 쿠웨이트가 침공당하면 미국이 방어해 줄 것인가’라는 질의에 ‘미국은 걸프 지역에서 어떤 국가와도 방위조약을 맺지 않았다’고 답변했다.
후세인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미국이 쿠웨이트 침공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해석했는지 여부는 추론의 영역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하나 있다. 미국은 이라크와 싸울 명분을 찾으려고 애썼다는 점이다. 조작도 서슴지 않았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점령하고 있던 1990년 10월 10일 미국 의회에 나온 15세 쿠웨이트 소녀의 눈물 어린 증언을 들어보자. ‘제가 자원봉사자로 일하고 있던 산부인과 병원에 들이닥친 이라크 군인들이 인큐베이터 안의 미숙아들을 던졌습니다. 제 조카도 이렇게 죽어갈지 모른다는 생각에 몸이 떨렸습니다’ 소녀의 증언 이후 이라크와 전쟁 개시에 부정적이던 여론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미국 상원에서 전쟁 결의안이 52대 47로 가까스로 통과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이 소녀의 증언은 가짜였다. 병원에 있지도 않았고 주미 쿠웨이트 대사의 딸이었다.
만약 미국이 후세인을 안심시킨 뒤 여론까지 조작하며 전쟁에 나섰다면 이유가 무엇일까. 답을 유보했던 이라크가 이란과 전쟁을 택했던 이유와 맥락이 비슷할 것 같다. 결과적으로 이라크와 이란, 쿠웨이트 간 물고 물리는 싸움에서 최종 승자, 유일한 승자는 바로 미국이다. 중동에서의 미국의 위상은 쿠웨이트 침공이 있었던 27년 전과 비할 바가 아니다. 이란을 내세웠다가 큰코다치고 미국이 이란을 견제할 카드로 썼던 이라크를 1,2 차 걸프전으로 혼내준 게 요즘 중동정세의 기본에 깔려 있다.
지역 패권국을 내세우기 보다 직접 주둔에는 돈이 많이 들어가지만 포기하기 어렵다. 전쟁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군산복합체의 이윤과 생존. 일찍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퇴임하면서 우려했던 ‘군산복합체’의 그림자도 갈수록 커진다. 속임수와 거짓이라는 행위 역시 과거 완료형에 머물지 않는다. 지난해 옥스퍼드 사전은 2016년의 단어로 ‘포스트 트루스(Post Truth)’를 꼽았다. 옥스퍼드 사전은 포스트 트루스를 이렇게 정의했다. ‘감정에 대한 호소나 개인적 신념이 객관적 사실보다 여론 형성에 더 영향을 미치는 상황.’ 군산복합체와 결합한 트럼프 시대의 언어가 더더욱 진실 바깥으로 넘어갈 것 같아 걱정이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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