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이 8일 밤(현지시간) 북한의 잇따른 도발에 ‘엄중한 우려’를 표하는 의장성명을 채택했다. ARF 외교장관회의(지난 7일)에 앞서 지난 5일 열린 아세안 외교장관회의에서도 ‘엄중한 우려’를 담은 별도 의장성명을 채택했다. 회원국들이 ARF 시작부터 끝까지 북한에 싸늘한 시선을 보내며 도발에 단호하게 경고한 셈이다.
이번 ARF에서는 상대적으로 북한의 우방인 아세안마저 북한에 완전히 등을 돌리며 북한의 외교적 고립이 얼마나 심각해졌는지 볼 수 있었다.
의장국인 필리핀은 ARF 폐막 날 늦은 밤 의장성명을 채택, “북한이 지난 7월4일과 28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시험 발사하고 지난해 두 차례 핵실험을 통해 평화와 안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긴장감이 고조된 데 대해 ‘엄중한 우려(grave concerns)’를 표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장관들은 유엔 안보리 결의 상의 모든 의무를 즉각 완전하게 준수할 것을 북한에 촉구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ARF는 지난해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에 대해 ‘우려(concerns)’를 표현하는 의장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우려’에서 ‘엄중한 우려’로 표현 수위를 높인 것이다.
의장성명 채택 시기도 빨랐다. 회담 하루 뒤 발표하긴 했지만 성명채택까지 2~3일 걸렸던 예년과 비교하면 이른 편이다. 그만큼 북한의 도발 문제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는 점을 반영한 결과로 풀이된다.
특히 성명은 “몇몇 장관들은 한반도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를 평화적으로 달성하는 데 대한 지지를 재확인하며 자제 발휘를 촉구하고 긴장 완화를 위한 대화에 유리한 환경 조성이 중요함을 강조했다”고 설명했다. 북한이 다른 외교무대에서 ‘비핵화’란 표현에 난색을 표했던 점을 보면 더는 북한의 편에 설 수 없다는 점을 드러낸 셈이다.
더욱이 국제사회가 북한 지도부를 겨냥하는 ‘인권’ 문제도 거론했다. 성명은 “일부 장관들이 납치자 문제의 즉각적 해결을 포함한 인도주의적 문제를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덧붙였다.
아세안 10개국은 ARF보다 앞서 열린 아세안 외교장관회의에서 ‘엄중한 우려’를 담은 별도 의장성명을 이례적으로 채택한 바 있다. 이는 아세안이 북핵 문제에서 북한 입장을 받아 줄 수 없다는 단호한 메시지를 내기 위해서다. 북한의 도발이 ‘임계치’를 넘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아세안이 힘을 합친 것이다.
실제 아세안 10개국 중 일부는 ARF 시작 전 북한과 양자회담을 계획했다. 그러나 북한에 보내는 경고 메시지가 약해질 수 있어 회원국들이 계획한 양자회담을 취소하기로 뜻을 모았다. 북한의 우방인 중국도 북한과의 양자회담에서 핵·미사일 도발에 강력히 경고하기도 했다.
ARF 회원국들이 ARF 일정 동안 북한 대표로 참석한 리용호 외무상을 외면하는 모습은 여러 번 포착됐다. 지난 7일 열린 환영 만찬에서 각국 장관들은 언론에 공개되는 동안 리 외무상과 눈길을 마주치지 않았다. 또 각국 장관들이 리 외무상 옆자리를 피한 것으로 알려졌다. 애초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리 외무상에 옆에 앉기로 돼 있었지만 행사 시작 직전 왕 부장의 자리가 조정되기도 했다.
/마닐라=류호기자 rh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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