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팅폿(인종의 용광로)’으로 불리는 미국에서 백인우월주의자들의 대규모 폭력시위가 발생해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극도로 심화하는 분열상으로 미국 사회가 충격에 빠진 가운데 미 언론들은 ‘민주주의의 위기’를 우려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휴가지에서 미국인의 단합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애초에 사회 갈등을 추동한 것이 트럼프 본인이라는 비판여론이 고조되고 있다.
미 ABC방송은 미국 버지니아주 샬러츠빌에서 12일(현지시간) 백인우월주의자들의 집단인 ‘우파연합’과 이에 반대하는 시위대 간에 폭력 충돌이 발생했으며 이 과정에서 중형차 한 대가 인종주의 반대 시위대를 들이받아 1명이 사망하고 19명이 다쳤다고 보도했다. 범행차량이 도로를 천천히 달리던 차량 가운데서 급발진했으며 1차 충돌 후 빠른 속도로 후진하며 추가 부상자를 낸 점에서 고의적 범행설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수사당국은 차량테러의 용의자로 오하이오주 출신의 20세 백인인 제임스 알렉스 필즈 주니어를 체포했다.
아울러 현장 안전을 지원하던 경찰 헬기가 샬러츠빌 외곽 삼림지대에 추락하면서 조종사와 주 경찰관이 사망해 이번 사태로 숨진 사람 수는 총 3명으로 집계됐다. 부상자 수도 30여명에 달했다. 테리 매컬리프 버지니아주지사는 사태가 폭력상황으로 비화하자 ‘주 비상사태’를 선포한 상태다.
이번 백인우월주의 시위는 지난 4월 샬럿빌 시의회가 남북전쟁 당시 ‘남부연합’을 지휘한 로버트 리 장군의 동상을 시내 공원에서 철거하기로 결정하면서 촉발됐다. 남부연합은 흑인 노예해방을 거부했던 주들로 여전히 미국 곳곳에 남아 있는 남부연합의 상징물은 인종차별의 흔적으로 여겨진다. 동상이 있던 공원은 이전까지 장군의 이름을 따 ‘리 공원’으로 불렸지만 시 의회는 이곳의 이름도 ‘해방공원’으로 바꿨다.
이날의 폭력사태는 전날부터 예견됐다. 전날 밤 버지니아주립대에서 시의회의 결정에 항의하기 위해 모인 우파연합은 횃불을 들고 ‘피와 영토’ ‘백인의 삶은 중요하다(white lives matter)’ 등의 구호를 외치며 행진했다. 이어 12일 아침 해방공원 인근에 우파연합 시위대가 재결집하고 이에 반대하는 맞불 시위대도 해방공원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면서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결국 서로 다른 지점에서 해방공원으로 향하던 두 세력이 오전11시께 맞붙으면서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대규모 인종주의 시위가 유혈사태로 치닫자 휴가 중이던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뉴저지주 베드민스터에서 “우리는 우리나라의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며 “애국심과 서로에 대한 애정을 가진 미국인으로서 단합하자”고 촉구했다. 다만 그는 “‘여러 편’에서 나타난 증오와 편견·폭력을 최대한 강력한 표현으로 규탄한다”고 말해 이번 사태의 책임을 백인우월주의자뿐 아니라 반대편에도 돌렸다. 이에 대해 뉴욕타임스(NYT)는 “백인 국수주의자의 지지를 받은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후 인종주의적 시위의 강도가 높아지고 있다”고 꼬집었으며 로스앤젤레스타임스(LAT)도 “트럼프 대통령이 인종주의를 부추겼다”고 지적했다.
인종주의 확산에 대한 비난과 자성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코리 가드너 공화당 상원의원이 “우리는 악을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며 “그들은 백인우월주의자였으며 이번 사태는 국내 테러”라고 밝히는 등 여야를 막론하고 비판이 속출하고 있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이번 사태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나온다. LAT는 이날 사설을 통해 “민주사회는 공동의 가치에서 강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다만 미국 곳곳에서 남부연합의 상징을 철거하는 사례가 많아져 샬러츠빌과 유사한 사태가 재발할 수 있다는 우려도 높아지고 있다.
/변재현기자 humblenes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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