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우파를 통합하자!”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신념으로 미 합중국 건국에 기여한 토머스 제퍼슨의 고향 버지니아주 샬러츠빌. 미국 동부에 위치한 이 조용한 소도시가 지난 12일(현지시간) 인종차별의 상징과 거친 구호로 뒤덮였다. 흰 고깔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극단적 백인우월주의 단체 큐클럭스클랜(Ku Klux Klan·KKK) 단원들이 제퍼슨 묘지 주변을 횃불로 에워싸며 흑인들을 위협하던 100여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모습에 미국 사회는 경악했다. “백인들의 나라를 되찾겠다”며 이날 샬러츠빌 거리로 뛰쳐나온 6,000여 백인우월주의자(white supremacist)들의 폭력시위는 3명의 사망자와 35명의 부상자를 내고서야 간신히 가라앉았다. 샬러츠빌 폭력시위를 계기로 그동안 미국 사회에서 가려졌던 추악한 인종주의의 민낯이 드러난 가운데 세간의 이목은 신나치주의자들과 함께 이번 시위를 주도한 대표적인 백인우월주의 집단, 미국에 뿌리 박힌 인종주의를 상징하는 KKK에게로 쏠리고 있다.
KKK는 노예제 폐지를 두고 미 북부와 남부가 치열하게 맞붙은 남북전쟁 직후인 1866년, 미 남부 테네시주의 작은 도시에서 퇴역군인 6명이 주도해 조직한 비밀결사대 형태의 백인우월주의 단체다. KKK라는 이름은 그리스어로 ‘모임·결사’를 뜻하는 단어인 키클로스(kyklos)에서 딴 것으로 알려졌다. 전쟁 패배와 노예제 해방으로 남부 경제가 붕괴하면서 흑인과 북부 공화당에 대한 적개심에 사로잡힌 극단주의적 인종주의자들이 조직한 KKK는 다른 인종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고 자신의 신원을 숨기기 위해 뾰족한 흰색 두건과 흰 가운을 쓰고 다니며 주로 흑인들에 대한 테러를 자행했다.
남부를 중심으로 외연을 확장한 KKK는 1920년대에 최고 450만명까지 급증했다. 이후 흑인만 타깃으로 삼던 초기 모습에서 벗어나 유대인과 아시아계 등으로 혐오 대상을 넓혀가며 1960년대까지 다양한 테러활동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낸 KKK는 정부의 혐오범죄 근절 노력과 자유주의 확산에 따른 시민인식의 변화로 1990년대 중반 무렵부터 사실상 힘을 잃은 상징적 단체가 됐다.
하지만 옛 기록이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던 KKK는 12일, 어둠 속에서 흰 고깔과 긴 옷으로 정체를 숨겼던 과거와 달리 대낮에 맨 얼굴로 타인종에 대한 혐오를 분출했다. 사라져가던 인종주의의 망령인 KKK가 양지로 나오게 된 것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존재와 미국 내에서 산재하던 ‘우파 극단주의’를 하나의 세력으로 결집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때문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이번 백인우월주의 시위가 대규모 유혈사태로 확산되며 이목을 끈 것은 이 시위가 KKK뿐 아니라 백인우월주의를 신봉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단체 알트라이트(Alt-right·대안우파) 소속 전투그룹 ‘알트기사단’, 신나치주의를 내건 ‘뱅가드 아메리카’, 미 남부 지역의 분리를 주장하는 ‘남부동맹’ 등의 연합세력에 의해 발발했기 때문이다. 시위가 소규모 극단주의자의 외침에 그치지 않고 대규모 유혈사태로 번진 것은 음지에 있던 KKK 부활의 신호탄 역할을 했다. 일견 뭉치기 어려워 보이는 이들을 한데 묶은 ‘마법의 힘’은 페이스북과 유튜브·트위터 등 SNS였다. 온라인 공간은 미국 곳곳에 모래알처럼 박혀 있던 백인우월주의자들이 서로 긴밀히 소통하며 집단적 행동을 하게 만드는 매개가 됐다는 것이 월스트리트저널(WSJ)의 분석이다. 이들의 싱크탱크 격인 ‘뉴저지주 국토안보 및 준비부’나 ‘국립정책연구소’ 등도 웹사이트와 SNS를 활용해 신입회원들을 끌어모으는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샬러츠빌의 ‘횃불’에 불을 붙이며 KKK 부활을 이끈 가장 중요한 배후는 트럼프 대통령이었다는 진단이 지배적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 뒤를 이어 백악관을 차지한 백인이라는 상징성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가 보여온 인종차별적 언행과 공약들이 백인우월주의자들의 세력에 힘을 실어줬다는 평가가 제기된다. 이번 샬러츠빌 시위를 기획한 데이비드 듀크 전 KKK 대표는 “우리는 나라를 되찾기 위해 결심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약속을 이행하라”며 참가자들을 독려했으며 KKK 지지자임을 자처하는 한 시위 참가자는 “트럼프는 깨닫지 못할지 모르지만 그는 분명 (우리와 같은) 정체성을 암시하고 있다”며 이번 시위가 대통령의 지지를 받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내비쳤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14일 시위대와 반대세력 “양쪽 모두에 책임이 있다”며 “여러 편에서 나타난 지독한 증오와 편견·폭력을 최대한 강력한 표현으로 규탄한다”는 양비론을 펴 사실상 백인우월주의자들을 두둔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뉴욕타임스(NYT) 등 미 언론들은 KKK 같은 단체들이 샬러츠빌 사태 이후 자신들을 비난하지 않는 백악관의 대응에 안도하고 힘을 얻을 것으로 전망했다. 한 인권단체에 따르면 6월 현재 미국에 존재하는 KKK 분파의 회원 수는 3,000여명으로 과거 ‘전성기’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쪼그라든 상태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계기로 백인우월주의자들의 각성과 결속이 이뤄지면서 KKK가 다시 세력을 불리고 제2, 제3의 샬러츠빌 사태를 일으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끓어오르는 냄비(Melting Pot)’로 불리는 다인종·다문화 사회인 미국에서 KKK의 횃불에 다시 불이 붙기 시작했다. /이수민기자 noenemy@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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