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경제를 침체의 수렁으로 밀어 넣은 2008년도 금융위기. 원인은 무엇이며 책임은 어디에 있을까. 대부분 월가의 탐욕을 위기의 원인으로 지목한다. 파생금융상품을 통한 무한 팽창으로 시장이 안에서부터 무너졌다는 것이다. 물론 반론도 있다. 정부의 정책 실패 탓이라는 것이다. 미국 중앙은행(FRB)의 방만한 통화정책과 정부의 주택시장 개입, 정부의 보증을 받은 모기지(주택담보부대출) 회사의 도덕적 해이가 상호 작용하면서 위기가 커졌다는 시각이다. 금융위기 직후에는 전자, 즉 위기의 원인과 책임이 월가의 탐욕에 있다는 시각이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후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위기 직후에는 거의 보이지 않았던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반격이 본격화하고 있는 셈이다. ‘시장은 실패하지 않는다’는 생각의 뿌리가 그만큼 깊고 강하다. 저변도 넓다. 지난 1974년 오스트리아 출신의 영국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를 시작으로 1976년 밀턴 프리드먼에 이어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신자유주의 경제학자가 8명에 이른다. 20세기 후반 경제학을 지배한 신자유주의의 태동은 79년 전인 1938년 8월 30일. 프랑스 파리에서 결성된 ‘월터 리프먼 콜로크(Colloque Walter Lippmann)’가 모태다.
모임에는 쟁쟁한 인물들이 참여했다. 회합을 주도한 프랑스 철학자 루이 루지에, 하이에크와 그의 스승 격인 루드비히 폰 미제스, 레이몽 아몽, 월러 리프먼 등 유럽과 미국의 경제학자와 철학자, 언론인이 모였다. 참석자들은 미국 언론인 출신의 평론가 월터 리프먼(당시 45세)의 저서 ‘자유 도시’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참석자들은 당시를 위기로 봤다. 경제 상황은 물론 자유주의 정치와 철학의 위기로 여겼다. 그럴 만 했다. 뉴욕의 증시 대폭락(1929년)으로 시작된 세계 대공황의 와중에서 정부의 역할이 강조되던 시기였으니까.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은 불황 탈출을 위해 재정 지출 극대화와 뉴딜 정책 시행 등 정부 주도의 불황 극복 정책을 펼쳤다. 히틀러 역시 고속도로 등 대규모 공공사업을 일으켜 독일 경제를 침체에서 끌어내려던 상황. 대부분의 국가가 시장경제 대신 계획 경제로 향했다. 소련 경제가 대공황을 겪지 않고 해마다 20% 이상의 초고속 성장을 달성했다는 소식이 각국의 경제정책 변화를 이끌었다. ‘월터 리프먼 콜로크’의 회원들은 토론에서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마저 소련의 스탈린과 비슷한 ‘빨갱이’로 여겼다. 공산주의와 전체주의, 계획 경제에 대한 위기감에서 신자유주의가 태동한 셈이다.
막상 신자유주의 모임은 이어지지 않았다. 전쟁(2차 세계대전) 탓이다. 흐지부지된 신자유주의 모임은 1947년 4월 되살아났다. 스위스의 휴양도시 몽펠르랭에서 하이에크와 프리드먼, 미제스, 카를 포퍼(‘열린 사회와 그 적들’의 저자) 등 학자 39명이 모여 열흘 간 토론 끝에 자유주의 경제학회를 만든 것이다. 처음에는 모임의 명칭을 ‘액튼 토크빌 학회(Acton-Tocqueville Society)’로 정했으나 ‘로마 귀족의 이름이 모임의 취지와 맞지 않다’는 미제스의 지적에 따라 모였던 장소의 이름을 땄다. 자유주의적 지식인과 학자들의 모임인 ‘몽팰르랭 학회(Mont Pelerin Society)’가 이렇게 태어났다.
동유럽의 공산주의 확산은 물론 서구의 복지 정책 확대까지 불신을 표시한 몽팰르랭학회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주류 경제학으로부터는 조롱까지 받았다. 조지프 슘페터는 ‘산 위의 경제학자 모임이 부질 없는 일이 될 것’이라고 비웃었다. 하이에크처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출신이었던 슘페터의 예측이야말로 부질없는 짓이었다. 1970년대 중반까지 케인즈 경제학에 밀렸던 신자유주의 경제학은 1980년대부터 미국과 영국을 필두로 지구촌 경제를 바꿨다. 세상은 갑자기 신자유주의 경제학, 프리드먼의 제자들로 차버렸다.
무엇이 신자유주의의 득세를 가져왔을까. 크게 세 가지 해석이 있다. 무엇보다 케인즈 경제학의 퇴조. 1970년대 두 차례의 석유 위기로 경기침체가 만성화한 가운데 케인즈 경제학으로는 스태그플레이션 현상을 잡지 못하자 대안으로 신자유주의가 모색됐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기술 발전설. 전후 황금기를 이끌었던 대량생산-대량소비시대가 사라지며 노동시장의 유연화와 산업구조 개편 필요성이 커져 신자유주의가 들어올 틈이 커졌다는 분석이다. 세 번째는 이윤압박설. 노동운동의 성장으로 자본의 이윤이 떨어지고 경제 위기로 직결되는 현상을 극복하려는 대안이 필요했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은 두 가지 면에서 자유주의 경제학과 차이가 난다. 고전 경제학, 즉 자유주의의 뼈대를 세운 아담 스미스는 정부의 역할을 배제하고 시장의 독점도 배격하는 반면 신자유주의는 정부의 역할은 일부 인정하면서도 시장에 대한 간섭은 철저하게 배격한다. 놔두면 시장이 자생적으로 최적의 균형을 찾아간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에 따르면 ‘어떤 정부든 시장에 개입해 경제를 운용할만한 실력이 없다. 결국 작은 정부에 머무는 게 가장 좋은 정부다. 계획과 통제는 경제를 망치는 첩경이다.’
신자유주의는 1980년대 미국과 영국에서 동시에 권력을 탔다.* 레이건 대통령과 대처 총리가 집권하며 규제 완화와 공기업 민영화, 노조와 대결 불사 등 신자유주의 정책이 쏟아졌다. 미국의 금리 대폭 인상으로 제 3세계 외채 위기가 불거진 것도 이 시기다.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 등도 후진국의 경제 위기 극복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혹독한 구조조정을 요구했다. 세계화 바람을 타고 지구촌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신자유주의는 번영을 가져왔을까? 글쎄다. 평가가 엇갈린다.
신자유주의자들이 자랑하는 미국과 영국에서의 성과 자체부터 이견이 많다. 레이건이나 대처가 작은 정부를 내세웠지만 오히려 ‘큰 정부’가 되고 결국은 재정을 악화시켜 최근까지 이어지는 각종 금융 위기의 씨앗을 뿌렸다는 비판이 있다. 미국의 부채 규모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보다 많이 사용한 레이건과 부시 등 공화당 행정부 집권 시기에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신자유주의가 이름만 요란했을 뿐 정부 정책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분석도 있다. 신자유주의가 득세하기 전인 1979년 13.8%였던 미국의 복지지출 비중은 1995년 15.8%로 증가했다. 같은 시기 영국은 16.4%에서 22.5%로 늘어났다.
어떤 주장이 맞는지 검증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지만 확실한 것은 한 가지 있다. 후진국일수록 주변부 국가일수록 신자유주의 경제의 피해를 집중적으로 입었다는 사실이다.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의 구조조정프로그램을 겪으면 전통적인 농업국가가 식량 부족을 겪고 서구 선진국 자본의 밑으로 들어갔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과정에서 영세한 산업은 점차 붕괴되고 초국가적 자본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세계인들이 즐겨 먹는 커피나 바나나 농가의 수입이 갈수록 줄어들고 다국적 회사의 시장 지배력과 이윤은 날로 불어난다.
앞으로 세상은 어떻게 변화할까. 장담할 수는 없고 불안만 앞설 뿐이다. 인공 지능(AI)과 세계화, 초국적 자본이 결합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지난 4월 서울에서 열린 몽팰르랭 학회 창립 70년 주년 기념 총회에서는 안보와 치안의 일부도 민영화할 수 있다는 견해가 나왔다. 군대와 경찰까지 민영화하자는 발상과 달리 실제 세상에서는 역(逆) 민영화도 빈번히 일어난다. 대규모 정전 사태를 겪은 캘리포니아는 전력 공급 일부를 공공부문으로 되돌렸다. 영국도 지하철 등 민영화했던 교통 인프라를 다시 사들이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신자유주의 논쟁이 거세게 일었던 시절이 있었다.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이라는 사태 속에 집권했던 김대중 정부는 IMF의 권고에 따라 구조조정과 민영화를 단행하고 노무현 정권은 각종 자유무역협정(FTA)를 맺어 세계주의자라고 비판 받았다. 대한민국에서는 ‘좌파 정부의 신자유주의정책’만큼이나 믿기 어려운 현상이 하나 있다. 전체주의와 공산주의, 계획 경제와는 생태적으로 상극인 신자유주의 경제학을 공부했다는 학자들이 어떤 논리로 군사 독재 시절이나 권위주의적 정권을 선호하는 지는 정말로 모를 일이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신자유주의가 처음 득세한 곳은 1980년 미국과 영국이 아니라 1974년 칠레였다. 민주선거로 당선된 칠레 아옌데 대통령이 미 중앙정보국(CIA)의 내정간섭과 정치공작으로 사살된 이후 들어선 피노체트 군사 독재정권의 경제를 프리드먼의 제자들, 즉 시카고 보이스들이 맡았다. 한국에서도 전두환 정권부터 신자유주의학파 학자들이 중용되기 시작했다. 대학생들은 케인지언으로 분류되던 스승이 통화론자(밀턴식 신자유주의자)로 변신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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