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9월 6일 오후 1시 57분, 일본 홋카이도 하코다테 공항. 국적과 기종을 알 수 없는 비행물체가 관제탑의 경고를 무시하고 착륙을 강행했다. 활주로를 185m나 벗어나 풀밭에 가까스로 멈춘 기체는 소련 극동방공군 소속 빅토르 이바노비치 벨렌코 중위(29세)가 몰고 온 미그-25 전투기. 서방세계가 ‘환상의 전투기’라고 부르며 두려움에 떨던 전투기였다. 그럴 만했다. 전투기의 성능은 속도가 우선이라는 사고방식이 강하게 남아 있던 시대에 미그-25는 음속(마하) 3배를 넘는 성능을 과시했으니까.
처음 선보인 시기는 1967년. 모스크바 에어쇼에서 편대로 등장한 미그-25를 소련 당국은 시속 3,000㎞가 넘는 초고속 전투기라고 자랑했다. 1971년부터 양산에 들어가 이듬해 실전 배치된 이후에도 미그-25의 구체적 성능과 용도는 여전히 베일 속에 감춰져 있었다. 미국은 이 전투기를 의식해 해군용 F-14와 공군용 F-15 전투기 개발에 속도를 냈다. 1973년 10월 4차 중동전에서 수차례 정찰 비행한 미그-25는 서방 진영 군사 전문가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중동에 파견된 소련 공군의 미그-25 전투기의 항적을 포착한 이스라엘 공군의 F-4 팬텀 전투기가 긴급 발진해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마하 3.2이라는 속도를 기록한 적도 있다.
냉전 속에서 미국과 소련의 경쟁이 한창이던 시절, 소련의 최고 군사기밀 덩어리인 미그-25 전투기는 어떻게 일본 공항에 나타나 착륙한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망명. 아내와 불화를 겪던 벨렌코 중위는 미국으로 망명을 작심하고 값비싼 선물인 미그-25 전투기와 함께 일본 땅에 내렸다. 애초 벨렌코 중위는 일본 항공자위대의 유도 비행을 기대하고 일본 영공에 접근했지만 자위대 전투기를 만날 수 없었다. 소련 공군의 추적을 피하려 저공 비행했기 때문이다.
일본도 포착은 했다. 오후 1시 11분께 북부 레이더 기지 세 곳에서 미확인 비행 물체의 접근을 확인하고 영어와 무선으로 경고를 보냈지만 무응답. 1시 20분쯤 치토세 기지에서 F-4J 팬텀기 두 대가 떴다. 미확인 비행물체는 얼마 뒤 모든 레이더 사이트의 감시망에서 사라졌다. 추적을 따돌리고 초저공 비행하던 벨렌코 중위의 미그 -25 전투기는 돌연 하코다테 공항에 나타나 불시착했다. 일본 경찰은 무단 침입죄로 벨렌코 중위를 체포한 뒤 경찰서로 데리고 갔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득달같이 경찰서로 달려갔으나 일본 경찰의 철저한 경비로 3일 뒤에야 벨렌코 중위를 만날 수 있었다. 소련도 발칵 뒤집혔다. 우선 일본에 기체 반환을 요구하고 나섰다. 불응하면 전쟁까지 불사한다는 으름장도 놓았다. 일본 내각은 소련의 요구를 들어주느냐, 미국의 기체 공동 조사 제의를 받아들이느냐를 놓고 격론을 벌인 끝에 후자를 골랐다. 미국의 압력에 따라 9월 24일 미그-25 기체는 하코다데 공항에서 미 공군의 대형수송기 C-5A 갤럭시에 실려 하쿠리 기지로 옮겨졌다.
미국 기술진의 주도로 약 2주 동안 미그-25 전투기는 철저하게 뜯겼다. 소련의 조속한 기체 반환 요구로 재조립이 끝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 기체는 11월 12일 목재 운반선에 실려 소련으로 되돌아갔다. 미그-25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던 미국과 일본 기술자들은 다시금 충격받았다. ‘공포의 존재’로 주목받았던 미그-25는 속도와 상승고도만 빼면 서방 진영 전투기 수준을 밑돌았다. 무엇보다 진공관이 나왔다. 트랜지스터를 넘어 반도체 시대에 접어든 마당에 무겁고 부피가 크며 쉽게 깨지는 진공관을 레이더 구성품으로 썼다.
일각에서는 고고도 전투환경에서 진공관이 더 나은 성능을 발휘한다는 주장이 나왔으나 미국과 일본은 소련의 전자기술이 예상보다 훨씬 낮은 상태라는 결론을 내렸다. 고속에 따르는 고열을 견디는 특수합금으로 만들었을 것이라던 추측을 낳았던 기체도 예상과 달랐다. 미국과 서방진영은 전투기 기체 재질로 고가지만 가볍고 강한 티타늄 사용을 늘려가던 시기에 미그-25는 강철이 대부분이었다. 기체 중량의 80%가 강철 합금, 티타늄의 비중은 9%에 그쳤다. 11%는 고속 비행에서 선회 기동 시 휘어지기 쉬운 알루미늄 합금이었다.
크고 무거운 기체를 고속으로 날리기 위한 엔진 자체의 출력은 높았어도 내구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드러났다. 엔진 수명주기가 서방제에 비해 20% 남짓이라는 추정까지 나왔다. ‘환상의 전투기’라는 두려움은 왜 퍼졌을까. 정보 부족 아니면 의도적인 과장. 두 가지 중 하나 아니면 둘이 섞였을 수 있다. 적성국가의 신무기 성능을 부풀리는 행위는 국방 관련 예산을 증액하는 고전적인 수법이다. 실제로 미그-25 전투기 등장 초기에 미국 의회는 특별 청문회를 열고 신형 전투기 개발을 서둘러야 한다는 권고안을 채택, 그대로 실행됐다.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미그-25 전투기 망명사건에 따른 각국의 손익계산서는 극명하게 엇갈렸다. 소련의 기술 수준이 적나라하게 밝혀지며 세계 각국의 미국제 무기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졌다. 소련은 통신과 암호체계를 전면 개편하는 데 최소한 20억 루블을 썼다. 실제 지출비용이 수백억 루블에 달해 항공모함 두 척의 건조가 취소됐다는 분석도 있다. 소련제 전투기를 사려는 국가도 줄어들었다. 울고 싶은데 뺨 맞은 격이 된 일본은 방공망의 취약성을 부각하며 군비 증강에 수백조 원을 퍼부었다. E-3C 조기경보기 13대를 비롯해 F-15 전투기 200대, 신형 호위함(구축함) 도입 사업이 망명 사건으로 탄력받았다. 과장된 공포는 국제 무기상의 자양분이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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