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 화장실과 공중 변소가 있다. 어느 게 더 깨끗할까. 답은 자명하다. 전자다. 내 차와 빌린 차가 있다. 어떤 차가 더 관리가 잘될까. 속단하기 어렵다. 자기 차에 온갖 정성을 기울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차 한 번 안 하는 경우도 많으니까. 공중화장실과 렌트 카. 둘 다 불특정 다수가 이용하는 대상인데 왜 차이가 날까. 렌트 카는 공짜가 아닌 탓이다. 공짜는 누구나 쉽게 접근하고 그만큼 빨리 상하기 마련이다. 경제학은 이를 ‘공유지의 비극(The Tragedy of the Commons)’이라 부른다.
경제학 용어로 널리 쓰이지만 ‘공유지의 비극’을 널리 유포시킨 주인공은 경제학자가 아니라 환경학자 게릿 하딘(Garrit Hardin). 평범한 생태학자였으나 캘리포니아 대학 환경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1968년 사이언스지에 기고한 짧은 논문 ‘공유지의 비극’으로 유명세를 탔다. 하딘이 발표한 논문의 요약. ‘누구에게나 개방된 풀밭을 머리 속에 그려보라……합리적인 목동이라면 가축 수를 늘린다. 가축을 늘려 돌아오는 소득은 온전히 자기 몫이고 늘어난 가죽이 뜯어 먹는 풀로 피해가 발생해도 개방된 풀밭(공유지)에 가축을 풀어 놓은 목동에게 골고루 돌아간다. 즉 n분(목동 수)의 1이다.’
하딘의 논문을 조금만 더 보자. ‘인간의 욕심은 단 한 마리 증가에 그치지 않는다. 계속해 가축 수를 늘리고 다른 목동들도 마찬가지다. 결국 비극이 발생한다. 목동들은 유한한 세계 안에 가축 수를 무한히 늘리도록 밀어붙이는 체제에 갇히고 만다. 종착역은 엉뚱하게도 파멸이다. 공유지의 자유는 모두에게 파멸을 안겨 줄 따름이다.’ 개개인의 합리적 선택이 전체의 몰락을 야기한다는 경고다. 하딘이 신문 기고문을 모아 발표한 이 논문의 의도는 ‘개인의 죄 의식 없는 행동이 환경에 피해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인구 통제와 자원 관리를 강화하자는 하딘의 생각과 달리 ‘공유지의 비극’은 경제 논쟁으로 번졌다. 누구보다 자유 경쟁을 선호하는 시장 만능론자들과 자본가들이 반겼다. ’공유지의 비극’ 논리는 이들에 의해 더욱 퍼졌다. ‘개별 기업의 권리, 사유재산권의 철저한 보장이 없는 한 ‘공유지의 비극’이 불가피하다는 주장과 함께. 아류도 많이 나왔다. ‘렌터카를 세차하는 사람은 없다’는게 대표적인 사례다. 공공성을 중시하는 측은 이에 ‘공유지의 무분별한 사용에 따른 황폐화는 곧 시장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맞섰다. 국가 개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실은 ‘공유지의 비극’이 경제 논란으로 비화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애초 이 개념을 얘기한 주인공은 윌리엄 포스터 로이드. 18세기 후반에 태어나 19세기 초중반 주로 활동했던 영국의 경제학자다. 로이드는 1833년 인구 문제를 다룬 강연에서 ‘개인의 합리적인 행위나 선택이 전체로 보면 비합리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봤다. 인구가 증가하면 할수록 공유지가 폐허로 변하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경고도 남겼다. 로이드 다음 타자는 미국 인디애나 대학의 경제학 교수 스콧 고든. 1954년 발표한 ‘공동 수산 자원의 경제 이론’을 통해 ‘바닷 속의 물고기는 어부에게 아무 가치도 없다. 오늘 잡지 않으면 내일 그 자리에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공유지 황폐화를 막기 위한 두 학자의 해법은 엇갈린다. 로이드는 ‘사유화 허용’을 대안으로 제시한 반면 고든은 어족 자원이 공유 목초지의 풀처럼 고갈되기 전에 어장의 공공기관 또는 국가 관리가 필요하다고 여겼다. 앞서 경제학자들이 공유지 황폐화를 경고하고 대안까지 제시했을 때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사안이 왜 하딘의 논문 발표 뒤에는 거센 논란을 야기했을까. 신자유주의가 고개를 들기 시작하던 무렵이었기 때문이다. 정부의 역할을 중시하는 수정 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는 케인즈 학파의 이론이 금과옥조로 여겨지던 시절, 시장 중심주의자, 신자유주의 성향 학자들은 ‘공유된 자산은 파멸을 낳는다’는 논리를 펼쳤다.
논란의 영역은 거의 무한대다. 환자들의 과잉 진료로 인한 건강보험의 질 저하에서 재벌 규제, 해양 어업 자원 고갈, 해마다 반복되는 보도블록 교체 공사까지. 인류는 지구촌이라는 공유지에 머무는 이웃이라는 점에서 기후변화협약도 공유지 논란으로 볼 수 있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대한 환경 보전 차원의 우려도 같은 맥락이다. 취임 직후 기후변화 협약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각료들을 기용하고 오바마 행정부 시절의 청정에너지 계획을 무력화한 것도 모자라 파리기후협약 탈퇴를 선언한 트럼프가 ‘공유지의 비극’을 초래할 것이라는 경고가 잇따랐다.
21세기 접어들면서도 공유지 논란은 여전하다. ‘반(反)공유지의 비극(The Tragedy of the Anticommons)’이라는 용어까지 나왔다. 캘리포니아대 마이클 헬러 교수는 1998년 사이언스지에 이런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고 2008년에는 책까지 냈다. ‘반공유지의 비극’은 ‘공유지의 비극’과 정반대다. 공유되어야 할 재산이 쪼개져 사유화하면서 사회 전체의 생산 증가를 막고 있다는 것이다. 특허나 지적재산권이 여기에 해당된다. 통행세나 ‘부동산 알박기’도 ‘반공유지의 비극’의 사례다.
‘공유지의 비극’과 ‘반공유지의 비극’은 상반되지만 ‘자원의 활용’이라는 공통의 주제를 다룬다. ‘공유지의 비극’은 자원의 과도한 사용을 우려하고 ‘반공유지의 비극’은 자원의 과소 이용에 따른 사회적 불이익을 주로 다룬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부터 신자유주의가 주춤거리며 제 3세계를 중심으로 후자를 강조하는 목소리가 커지는 분위기다. 최근에는 ‘공유지의 비극’에 맞서 ‘사유화의 비극’이라는 말도 생겼다. 주택을 수십 채씩 지닌 부자의 증세 문제도 이런 논쟁의 연장으로 볼 수 있다. 부의 편중과 양극화 현상이 심화할수록 논쟁은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공유지의 비극이든 사유화의 비극이든 한정된 자원의 과다 또는 과소 이용을 제어할 길은 없을까. 김윤상 경북대 교수(행정학)의 학술논문 ‘공유지의 비극과 사유화의 비극’에서 제시하는 대안이 눈길을 끈다. 김 교수에 따르면 ‘공유지의 비극’이나 ‘사유화의 비극’은 공통점이 있다. ‘이해타산을 따지는 합리적인 개인이 전체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공유지의 비극이나 사유화의 비극은 ‘이기적 개인주의의 비극’인 셈이다. 해법은 두 가지다. 사고 방식의 수준을 높이거나, 사익이 공익으로 연결되는 장치(아니면 적어도 사익이 공익을 해칠 수 없는 장치)를 만들거나.
김 교수는 개인들이 사익과 함께 공익을 생각하려면 교육과 종교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기대하기 어렵다고 진단한다. 공감이 간다. 교육과 종교가 사회를 망치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테니. 분배와 성장, 세제 개편을 둘러싸고 사회적 갈등을 빚는 한국에서 ‘공유지의 비극’은 더욱 더 논란을 부를 가능성이 크다. 요즘은 잠잠하지만 지난해 말부터 적용된 김영란법도 ‘공유지의 비극’과 관련이 깊다. 법인(회사) 돈을 공유지의 풀처럼 막 쓰는 풍토가 분명히 있었다. 법과 제도가 공유지를 방치하지 않도록 가다듬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공유지의 비극’ 논란을 불러 일으킨 개릿 하딘은 경제학자로 오인 받았으나 또 하나의 논쟁거리를 세상에 던졌다. 하딘은 1974년 ’바이오 사이언스’지에 실린 ‘구명보트 윤리(Living on Life)’에서 섬뜩한 논리를 펼쳤다. ‘두 척의 구명보트가 있다. 구명보트 A엔 정원 여유가 있는데다 물자까지 충분하다. 반면 구명보트 B는 정원초과에 물자 부족 상태다. 하딘은 여기서 묻는다. A는 B를 구해야 할까? 다른 비유도 있다. 정원 60명인 구명보트에 부자 50명이 타고 있다. 바다에는 구조를 바라는 100명이 떠다니고 있다. 구조해야 하나?
하딘의 선택은 아무 짓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명분은 미래의 생존. 하딘이 생각하는 최악의 선택은 모두 다 살자는 것이다. 하딘의 논리를 따라가 보자. ‘정원 60명인 부자 보트에 탄 50명이 표류자 100명을 다 태우면 결과는 자명하다. 구명보트는 침몰해 모두 익사한다. 완벽한 정의의 실현이 완벽한 파국을 낳은 형국이다. 10명만 태운다고 치자. 어떻게 고를 것인가. 결국 누구도 구조하지 않는 게 최상의 선택이다.’ 하딘은 왜 이런 주장을 펼쳤을까. 후진국에 원조하지 말라는 얘기다. 선진국이 빈곤국가를 지원하거나 관대한 이민정책으로 난민을 받아들이면 선진국도 침몰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가 담겼다.
빈민을 도와주지 말고 놔두라는 얘기의 원작자는 따로 있다. 인구론의 저자인 토마스 맬서스 목사. ‘1798년 출간한 인구론 초판에서 맬서스는 ’급여 인상은 유해하다. 고소득이 출산과 과잉 노동력을 낳아 결국에는 임금이 떨어질 테니까.’ 후속편에서는 ‘빈민가를 더 좁고 더럽게 조성해 전염병이 돌도록 유인할 필요가 있다. 질병 퇴치 노력은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썼다. 개혁주의자들은 맬서스의 철자를 고쳐 ‘몬스터(Monster·괴물)’라고 비난했지만 자본가들은 쌍수를 들며 반겼다.
개릿 하딘은 ‘지구의 미래를 걱정한’ 맬서스주의자에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을 신봉한 다윈주의자였다. 지구촌의 미래를 걱정했다기보다 우월한 종이 살아남는 진화의 오랜 과정을 통해 승리한 백인과 그 문화의 보전을 위해 고민했던 하딘은 적지 않은 비난을 받았다. 그래도 맬서스처럼 ‘괴물’이라고 지탄 받지는 않았다. 하딘은 죽을 때도 세상에 적지 않을 충격을 던졌다. 인구과잉에 따른 생태계 파괴를 막기 위해 죽는 날을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며 결혼 62주년 직후인 2003년 9월 14일 아내와 동반 자살했다. 89세, 치매를 앓던 그의 아내는 80세였다. 의학 발달로 맞이한 수명 100세 시대, 하딘처럼 마지막을 스스로 결정하는 사람들은 많아질지도 모르겠다.
하딘의 마음 속에만 있는 것 같았던 각박한 세상은 어느 새 현실이 됐다. 중동과 아프리카의 난민을 받아들이는 유럽의 태도를 보니 그렇다. 기후 변화 협약에 관한 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공유지의 풀을 먼저 뜯을 권리가 있다며 당당하게 말하고는 미국인들에게 ‘잘 했지’라고 동의를 구하는 것 같아 보인다. 세상 참. .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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