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영(가명)아, 오빠 밥 좀 차려주고 가라.” 아, 아르바이트 늦었는데 큰일이다. 오후 2시부터 아르바이트 시작인데 벌씨 1시 20분이다. 카페 사장님이 립스틱에 정장구두, 스타킹은 필수랬는데 아직 화장은 시작도 못했다. 빨간색 립스틱을 아무렇게나 칠하고 일어서는데 어제 점장이 한 말이 귓가에 맴돈다. “지영씨, 요새 살 쪘더라. 공부 잘 못하면 몸매라도 관리 잘 해야 되는 거 알지?”
식탁에 아무렇게나 밥을 퍼서 올려놓고 밖으로 뛰어나왔더니 택시가 보인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타지 말았어야 했다는 걸 직감했다. 기사는 대뜸 “예쁜 아가씨가 어딜 그렇게 급히 가?”라고 묻는다. 도착할 때까지 기사의 ‘외모플레인’은 끝날 줄을 모른다. “아가씨는 얼굴은 이쁜데 화장이 좀 진하다. 남친은 있어?” 입을 꾹 다물고 가만히 있었더니 이번엔 “왜 이렇게 애교가 없어? 쯧쯧…”하고 혀를 찼다.
싫은 소리 들어가며 택시를 탔지만 결국 사장님한테 혼났다. 옷매무새 흐트러진 것도 감점이 됐다. 계산대 앞에 섰는데 한 남자가 와서 “커피가 맛이 없다. 매니저는 없냐”고 묻는다. 내가 매니저라고 설명했지만 남자는 믿지 못하겠다며 다른 매니저를 불러오라고 호통이다. 뒤에 있던 험상궂은 남자직원이 다가와 “무슨 일이냐”고 묻자 남자는 우물쭈물하다 자리로 돌아갔다.
심기불편한 얼굴로 커피를 타는데 아까 봤던 그 남자, 다시 돌아왔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하는 말이 가관이다. “아깐 화내서 미안한데, 계속 보니까 제 스타일이라서요. 화장만 좀 연하게 하면 예쁘겠어요. 번호 좀 주시면 안 될까요?”
공적 장소에서도 늘 아름다움을 유지해야 하거나, 가정의 수호신이어야 하거나, 상냥하고 애교 있는 여성의 역할을 강요받는 수많은 ‘지영이’들의 하루다. 위 하루 일과는 한국여성민우회가 창립 30주년을 맞아 발표한 ‘2017 성평등 보고서’의 사례를 모아 각색한 내용이다. 민우회는 일상 속 성차별을 주제로 1,257명에게 온·오프라인 설문조사를 진행해 모은 총 4,563건의 사례를 28일 공개했다. 응답자들은 ‘가족관계 속 성차별(23%)’과 운전 및 대중교통 이용(15%), ‘학교생활(14%)’, ‘일터(13%), 대중매체(13%)에서 성차별을 느꼈다고 답했다. 서울경제신문은 응답자들이 생생한 언어로 기입한 실제 사례들을 유형별로 소개한다.
◇“오빠 밥 차려줘라”, “살 좀 빼렴”
가족 관계 속 성차별은 모든 성차별 사례 중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주로 가사·돌봄 노동 강요와 통금 규제, 빈번한 외모평가가 이유가 됐다. 응답자들은 “오빠 밥 차려줘라”, “왜 여자애가 애교가 없니?”, “너는 외모가 별로이니 공부라도 열심히 해”와 같은 일상적 외모·성별 차별에 시달려야 했다고 답했다. 일부 여성들은 어린 시절 자신도 좋아하는 오징어 초무침을 할머니가 오빠에게만 줬다거나, ‘남동생이 있으니까 누나들이 대접 받는 거다’라고 말했던 장면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었다.
또 유영철 사건이 있었을 때 “나도 이런 일 생길까 봐 무섭다”고 했더니 “넌 뚱뚱해서 안 잡아가”라는 대답, “뚱뚱한데 짧은 치마 입고 싶을까”와 같은 말도 일상 속 외모차별을 그대로 보여준다. 앞 문장과 뒷 문장이 전혀 관계가 없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연관성을 가지는 말로 자주 읽힌다. “화장은 자기관리”라거나 “네 나이 때 꾸미는 건 기본예의”라는 발언도 잦다.
◇여자는 피구, 남자는 축구?
학교생활에서도 성차별은 빈번하게 발생했다. 10대~20대 여성 전반이공통적으로 제기한 문제는 교육자의 성차별 발언이었다. 교사들은 “남자애니까 그럴 수 있지”와 “여자애가 왜 그래”를 전제로 여학생들에게 특수한 덕목을 요구하는 경우가 잦았다. 주로 “힘쓰는 일은 항상 남성, 미화(청소)는 여성”, “생리대 빌리는 건 부끄러운 일”, “발표자는 화장과 굽 있는 구두가 필수”라는 발언이 문제가 됐다. 학창시절 담임교사들이 여학생 반에 들어와 ‘여자반인데 냄새가 난다’거나 ‘여자애들이 왜 이렇게 시끄러워’라며 은연 중에 여성들이 특정한 모습이어야 한다고 강요하거나, “여자들은 멍청하고 질투심이 심해서 트럼프를 찍고 남자들은 똑똑해서 힐러리를 찍었다”는 말을 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택시 타자마자 “아가씨는 몇 살이야?”
공공장소에서 20·30대 여성들이 반말과 외모평가를 겪는 일은 숱하게 많다. 택시가 대표적이다. 초면부터 ‘아가씨’, ‘미인을 태워 영광’, ‘예쁜 아가씨 가시는 길 모셔다 드려야죠’는 여성 고객들이 한 번씩은 다 들어봤을 만큼 흔한 ‘택시기사 멘트’다. 운전하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성차별을 느꼈다는 699명의 응답자들은 ‘운전 시 폭언·무시·비하’와 ‘택시 승차 차별·사생활 간섭·반말’을 꼽았다. “여자는 대학 못 가도 시집 잘 가면 되니 스트레스 받을 게 없다”거나, “결혼해서 애 낳고 사는 것이 최고의 행복 아니냐”는 발언도 자주 듣는 말로 꼽혔다. 운전 못하는 운전자를 흔히 중년여성을 빗대 ‘김여사’라고 부르는 경우도 잦았다.
또 은행이나 부동산 중개업소를 방문했다가 “남편 분은 어디 계세요?”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는 증언도 있었다. 임신 중이었던 한 응답자는 부동산에 가서 꼼꼼히 조건을 따져 물었더니 ‘임신해서 예민하시네요’, ‘남편분 허락 받으셨어요’하며 매우 피곤해했다고 밝혔다. 이 같은 일상적 성차별 질문에 한 여성 응답자는 익살을 담아 일침을 날렸다. “저기요, 제 보호자는 전데요?”
◇“00씨는 여잔데도 참 남자 같이 일을 잘 해”
직장생활에서도 여성직원은 여자라는 정체성을 지우기 어렵다. 응답자들은 “여자인데 잘 하네”, “여자라서 잘 못한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고 답했다. 한 여성은 협동조합 입문교육을 갔다가 “주부님들 수다 떠는 거 아니고 사업이다”는 말을 듣고 매우 불쾌해했다며 “모든 여자는 주부인가? 주부는 그냥 수다만 떠는 존재인가?”라고 되물었다. 자신을 여성 프로그래머라고 밝힌 한 응답자는 면접을 볼 때 ’애가 몇 살이냐‘, ’야근도 할 수 있냐‘며 남자한테 안 물어보는 질문을 구직 단계에서부터 받았다고 밝혔다.
아르바이트생들도 ‘화장은 직업에서의 예의’라고 생각하는 분위기, 스타킹과 구두 착용 필수, 빈번한 외모 지적이 힘겹다고 답했다. 판촉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한 응답자는 “활동이 많은 아르바이트인데도 굉장히 짧고 불편한 치마를 입으라고 했다”고 고백했다.
◇키스해도 되냐고 물어봤어요?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의 손목을 낚아채거나, 벽으로 밀어붙이거나, 키스를 강행하는 장면이 로맨틱하게 그려지는 드라마 속 일부 장면들도 문제로 꼽혔다. 억지로 잡아끌기, 고성 및 언어폭력, 물건 부수기, 동의 없는 관계 공표, 길에 버리고 가기와 같은 장면이 예시다. 한 여성 응답자는 그런 장면을 볼 때마다 “저기요, 저한테 키스해도 되냐고 물어봤어요? 왜 손목 잡아요?”라고 묻고 싶다고 답했다.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며느리는 나쁜 년으로, 시어머니는 표독스럽게’ 콘셉트도 있다. 드라마 애청자라는 한 응답자는 “50대 이상 여배우들이 주연으로 등장하는 영화나 드라마가 극히 적다”며 “이들은 늘 가정이라는 서사 안에서 누군가의 할머니, 시어머니로 등장할 뿐”이라고 지적했다. 드라마에서 남편은 아내한테 “당신, 요즘 피곤해 보여”라고 반말하고 아내가 “그래요? 좀 피곤하긴 해요”라고 존댓말하면서 사과 깎는 장면이 그 예다. 또 “아무리 잘 나가는 여자도 결국 남자 때문에 눈에 점 찍고 복수하거나 망한다는 전개”, “못생겼던 여자들이 남자에게 버림받으면 복수하기 위해 성공하고 예뻐지는 전개”를 성차별의 대표적 장면으로 꼽았다.
민우회는 “현재의 차별을 확인하는 것은 개인들의 일상 속 경험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확인하는 과정”이라며 “주어진 현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저항의식과 약자들이 해학이 엿보였다. 변화는 이미 진행중이다”고 평했다. 민우회는 이날 3시 사례 발표 및 토론회를 열고 △‘딸’ 역할 강요 않기 △학교현장에 페미니즘 들이기 △외모 꾸미기 강요 말라기 △통금규제 없애기 △‘여자’ 아닌 동료로 대해주기 △다양한 여성캐릭터 만들기 등을 제안했다.
/신다은기자 downy@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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