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지금 누리는 평화는 수많은 선조(先祖)들의 한숨과 눈물, 그리고 피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소설로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미국과 중국·북한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는 한국 현실을 감안하면 일제강점기의 혼란으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칼과 혀’로 제7회 혼불문학상을 받은 소설가 권정현은 11일 오전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역사를 다룬 것 같지만 실은 현대인에게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칼과 혀’는 1945년 일제 패망 직전의 만주를 배경으로 전쟁을 두려워하는 일본 관동군 사령관 모리와 그를 암살하려는 중국인 요리사 첸, 성(性)노예로 끌려가 끔찍한 고통을 겪은 조선인 길순이 번갈아 화자로 등장해 이야기를 풀어간다. ‘칼과 혀’는 군사적 무기와 미각을 가리키는 이중적 상징이다. 부엌에서는 세 사람의 고향 추억이 서린 한중일 요리가 만들어지고 인물들은 음식을 매개로 서로를 이해하기도 한다.
혼불문학상은 한국 문학이 낳은 대표적인 장편 대하소설 가운데 하나인 ‘혼불’의 최명희의 예술세계를 기리기 위해 지난 2011년 제정됐다. 올해 심사위원들은 ‘칼과 혀’에 대해 “한중일의 역사적 대립과 갈등을 넘어 세 나라 간의 공존 가능성을 타진하고 그 가능성을 높은 예술적 경지로 끌어올렸다”고 평가하며 전원 만장일치로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작가는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붙잡힌 뒤 뤼순 감옥에서 집필한 ‘동양평화론’에서 깊은 영감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권 작가는 “안중근 의사는 결국 세 나라가 힘을 합쳐야 한다는 선견지명 같은 얘기를 하셨다”며 “원수까지 사랑하는 게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아닐까”라고 되물었다.
권 작가는 이 소설을 쓰는 데 오롯이 3년이라는 시간을 쏟아부었다고 한다. 그는 “사실 ‘혼불’처럼 현실과 무속 신화가 뒤섞이는 대하소설을 쓰고 싶었다”며 “어느 순간 능력과 내공의 한계를 절감하고 장차 작업하게 될 대하소설의 ‘워밍업’ 차원에서 ‘칼과 혀’를 먼저 구상하게 됐다”고 소개했다. 이어 “글을 계속 쓰면서 살아갈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는데 혼불문학상을 받게 돼서 작가로서 큰 격려를 얻은 느낌이었다”고 덧붙였다.
권 작가는 “에밀 졸라를 통해 19세기 파리의 내밀한 풍경을 볼 수 있고 혜경궁 홍씨를 통해 조선 궁중의 모습을 알 수 있듯 ‘칼과 혀’가 100년 뒤에도 우리나라 역사의 지점들을 보여주는 작품이 되기 바란다”고 소망했다. 그러면서 “몸풀기를 끝냈으니 이 작품을 모태로 한 12권짜리 대하소설에 본격 도전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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