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층은 언제나 총기로 자신들을 보호하고 몸을 사리면서 대중에게는 총기 사용을 경계하라고 합니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58명의 목숨을 앗아간 총기난사 사고가 발생한 지 사흘 만인 지난 5일(현지시간) 전미총기협회(NRA)의 웨인 라피에르 최고경영자(CEO)는 보수성향 매체인 폭스뉴스에 출연해 민주당을 중심으로 제기되는 총기규제 강화 요구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역대 최악의 총기사고 후 척 슈머 민주당 원내대표가 트위터에서 “의회와 미 대통령은 국가를 더 안전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을 해야 한다”며 “이제는 매년 총기난사로 희생되는 미국인들을 위해 NRA에 맞설 때”라고 NRA를 정조준하자 민주당의 이중성을 지적하고 나선 것이다. 그는 이어 “국가가 보장하는 무기소유 권
리를 수호하고 국민이 스스로 보호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NRA가 존재하는 이유”라며 총기사용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불과 10여분 만에 500여명의 사상자를 낸 라스베이거스 참사 이후 미국 사회에는 또다시 총기규제에 대한 여론이 들끓고 있다. 이번에 논란의 중심이 된 것은 라스베이거스 총기난사의 범인인 스티븐 패덕이 사용한 ‘범프스톡(bump stock)’이다. 패덕은 반자동소총을 자동발사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주는 이 장치를 10만원 정도에 구입해 자신의 소총을 분당 800발까지 연속 발사할 수 있는 기관총으로 둔갑시켜 2만명의 시민들을 향해 난사했다. 충격적인 사건에 의회에서는 범프스톡 통제법안이 발의됐고 총기 소유를 옹호하는 공화당 내에서도 범프스톡 사용을 금지해야 한다는 소신 발언이 등장했다. 하지만 이 법안이 의회 표결을 통화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해마다 총기학살이 자행되는 데도 미 의회에서는 대부분의 규제법안이 부결돼왔기 때문이다. 지난해 49명의 목숨을 앗아간 올랜도 총기난사 참사 당시에도 총기 판매자 및 구매자의 신원조회 의무화 등을 골자로 한 법안 등 4건이 발의됐지만 모두 상원에서 부결됐다.
비영리재단인 총기사건아카이브(GVA)에 따르면 지난해 총기사고에 따른 사망자 수(약 2만명의 총기 자살 제외)는 1만5,000여명으로 3년 전보다 2,500명가량 증가했다. 올 들어서는 이달 11일까지 벌써 1만2,040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처럼 점점 더 많은 미국인이 뜻하지 않은 총기사건으로 목숨을 잃는데도 번번이 규제 시도가 물거품이 되는 것은 정치권에 미치는 NRA의 강력한 입김 때문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미 수정헌법 제2조에 명시된 ‘무기휴대의 권리’ 사수를 앞세우며 공화당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NRA의 로비가 존재하는 한 어떤 끔찍한 총기사고가 일어나도 미국 정치권이 강력한 총기 규제를 실행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NRA가 범프스톡을 규제해야 한다는 이례적인 성명을 내놓으면서도 완전히 금지하는 법안에는 반대한다는 입장을 거듭 강조하자 미 언론들은 실효성 있는 입법이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CNN은 “워싱턴(의회·백악관)은 NRA가 받아들일 수 있는 사소한 조치에서 더 나아가지 못할 것 같다”며 “공화당은 라스베이거스 참사의 충격이 사그라질 때까지 의회 일정을 통제하면서 논의를 방해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 정치권에 미치는 NRA의 영향력의 원천은 막대한 회원 수를 자랑하는 거대한 조직 규모와 이들이 뒷받침하는 자금력이다. 1871년 미 남북전쟁 당시 북부 출신 장교들을 주축으로 설립된 NRA는 현재 약 500만명의 회원을 거느린 미국 내 최대 이익집단 중 하나로 회원 상당수는 무기업자들이지만 면면을 들여다보면 정치·경제·스포츠 가릴 것 없이 각 분야의 유명인사들이 즐비하다. 역대 미국 대통령 28명 가운데 협회에 가입한 대통령만도 9명에 달한다. 이 가운데 8명은 공화당 출신이지만 민주당의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도 포함돼 눈길을 끈다. 아홉 번째로 이름을 올린 대통령은 현직에 있는 도널드 트럼프다. 비즈니스인사이더는 “트럼프는 조지 H W 부시 이후로는 처음 NRA 회원이 된 대통령”이라며 그가 지난 대선 기간에도 NRA와의 긴밀한 관계를 과시하며 총기소유 권리를 강조해 왔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특히 NRA는 거대한 회원 조직에 힘입어 조성된 천문학적 로비 자금을 공화당에 쏟아부으며 의회에서 총기 규제를 차단하기 위한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미 선거자금 감시단체인 CRP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선거에 NRA가 쏟아부은 자금은 로비에 쓰인 금액과 기부금 각각 318만8,000달러와 109만200달러 등을 포함해 총 5,868만달러(약 665억원)에 달한다. 공화당전국위원회에 기부한 자금은 7만7,185달러에 달했고 개별 정치인으로는 로이 블런트 상원의원에게 가장 많은 금액(1만1,900달러)을 지원했다. 올해 들어 사용한 로비 자금만도 벌써 320만달러에 육박한다. 많은 미국인들이 총기범죄 차단을 위한 강력한 규제를 요구하는데도 공화당은 물론 백악관도 NRA에 꼼짝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뉴스위크는 트럼프 대통령이 4월 NRA 정례포럼에서 국민의 총기사용 권리를 지켜내겠다고 강조한 점을 들면서 “트럼프는 라스베이거스 참사에도 총기규제법을 건드리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NRA는 정치인들의 등급을 매겨 표심을 좌우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총기에 얼마나 우호적이냐에 따라 A부터 F까지 등급을 매기는 식이다. BBC는 “NRA는 회원들을 동원해 간접적이지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며 “NRA가 매긴 등급은 여론조사 결과와도 긴밀한 관련이 있다”고 지적했다.
/김창영기자 kcy@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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