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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편협한 진영 논리 벗어나 애국의 본질 생각했으면..."

■한국 외교현실 닮은 '남한산성' 원작자·감독이 본 영화 밖 이야기

백성들엔 충실하게 살아가는 일상이 곧 애국

민생 외면속 애국심 강요땐 국민 지지 못얻어

표현 어려운 소설 문체 감독이 시각화 성공

참혹했던 병자년(丙子年) 겨울을 배경으로 한 영화 ‘남한산성’은 강대국에 둘러싸인 오늘날 대한민국의 외교 현실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이 때문에 영화는 정치권에서도 일찌감치 화제가 됐다. 작품 속 최명길과 김상헌의 첨예한 대립을 흉내라도 내듯 보수·진보 진영은 같은 영화를 보고 극과 극의 반응을 내놓았다. 권력의 변두리로 밀려난 야권은 “군주가 무능하면 백성이 피해를 본다”며 대통령을 겨냥했다. 이에 여권은 “외교적 지혜와 국민적 단결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점”이라며 보수 진영의 공세를 일축했다. ‘남한산성’의 원작자인 김훈과 소설을 스크린으로 옮긴 황동혁 감독은 정치권의 공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서울경제신문의 문학기자와 영화기자가 지난 13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한 카페에서 두 사람을 만나 바람직한 위정자의 모습 등 영화 안팎에 대한 생각을 들었다.

‘남한산성’ 원작자 김훈·황동혁 감독 /송은석기자




소설가 김훈(69·사진)은 영화를 둘러싼 정치권의 아전인수(我田引水)식 해석에 대해 “참 답답하고 안타깝다”며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는 ‘인간의 삶’과 ‘역사의 길’이라는 근본적이고 심원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남한산성’을 편협한 진영 논리의 틀 안에 가두고 있는 정치인의 행태에 작심한 듯 불만을 토로했다. “자기 입맛대로 해석을 내놓은 정치인들은 작품이 제기하는 문제의 핵심에서 한참 비켜나 있습니다. 김상헌과 최명길은 결코 이념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각자의 방식으로 애국충정을 다하는 것일 뿐이지요.”

그러면서 그는 “상헌과 명길은 칼싸움을 하듯 팽팽한 대결을 펼치면서도 끝까지 서로를 존중하고 예절을 갖추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상대를 깎아내리지 못해 안달인 정치권이 ‘남한산성’을 통해 반대 진영을 보듬어 안는 포용을 배웠으면 하는 바람을 속으로 삼키는 듯했다.

김훈은 두 주인공에 대한 의견은 쏟아내면서 백성과 민초를 대변하는 인물인 ‘서날쇠’에게는 집중하지 않는 정치인들에 대해서도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는 “서날쇠와 수어사 이시백은 비록 주인공은 아니지만 굉장히 중요한 캐릭터”라며 “자기 일과 생활에만 집중하는 이들은 딱히 애국심을 갖고 있지 않지만 이 사람들이야말로 애국의 본질을 알고 있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작가의 설명대로 이시백과 서날쇠는 ‘남한산성’에서 자기가 맡은 본분에 대한 책임감과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일상의 소중함을 분명한 대사로 표현한다. 이시백은 ‘당신은 어느 쪽이냐’라는 최명길의 물음에 “나는 다만 다가오는 적을 잡는 장수일 뿐”이라 답한다. 서날쇠 역시 상헌을 향해 “조정 대신들이 명나라 황제를 받들든 청나라를 따르든 백성들에겐 의미가 없소. 그저 백성들은 봄에 씨를 뿌려 가을에 거둬들이고 겨울에 굶지 않는 세상을 꿈꿀 뿐이오”라고 말한다.

김훈은 “대사에 의미가 그대로 담겨 있듯 백성은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이 아니다. 논과 밭, 소와 말, 그리고 처자식을 걱정하는 사람이 백성”이라며 “논밭을 일구는 백성의 생활을 보호하고 그 생활이 애국이 될 수 있도록 틀을 만들어 주는 것이 정치가 해야 할 역할”이라고 충고했다. 그러면서 “충효(忠孝) 관념이 사라진 오늘날, 정치가 인간의 노동을 보호하지 않고 민생을 돌보지 않으면서 애국심만 가지라고 강요한다면 국민으로부터 절대 지지를 받지 못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훈은 각색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 영화에 대해 열려 있는 태도를 보였다. 그는 “최명길의 갓 위로 청나라 군대의 화살이 쏟아지는 영화 도입부가 참 마음에 들었다”고 전했다. 이어 “전체적으로는 톤(tone)이 좋았다”며 “소설의 문체와 톤을 시각화하는 게 결코 쉽지 않았을 텐데 이 작업을 매우 훌륭하게 해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작가는 “소설에서 청태종을 묘사할 때 ‘군사 깡패’의 면모와 황제의 위엄을 함께 갖춘 인물로 그리려고 노력했다”며 “영화 역시 청태종과 통역관, 인조 등 그 어떤 인물도 폄하하지 않고 정당성을 갖춘 캐릭터로 묘사하고 있더라”고 만족감을 표시했다.

영화의 결말에 대해서도 김훈은 “나는 소설에서 비록 미약하고 나약한 것이지만 신비하고 아름다운 생명의 힘을 ‘희망의 싹’으로 보여주면서 마무리를 지었는데 영화는 과연 어떻게 결말을 맺을지 궁금했다”고 털어놓았다. 이어 작가는 “연 날리러 가는 나루에게 날쇠는 ‘너무 멀리 가지 마라’고 말한다”면서 “상헌과 명길이 목숨 걸고 벌이는 논쟁보다 훨씬 소박한 희망과 사랑이 담긴 문장이다. 정말 아름다운 대사”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소설은 뱃사공의 딸인 나루가 초경을 치르는 것으로 끝나지만 영화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서날쇠와 나루를 한데 비추며 문을 닫는다.

일흔의 나이에도 당당한 현역으로 살고 있는 이 노(老)대가는 차기작에 대해서도 귀띔해줬다. 김훈은 “인간이 살아보지 않은 시대, 문명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 시대, 과거와 미래가 마구 섞여 있는 시대를 판타지 형식으로 만들어 보려고 한다”며 “기록과 실존 인물에 의존할 수 있었던 ‘남한산성’과 달리 오직 상상만으로 창조해야 하는 작품이라 쉽지 않겠지만 새로운 도전을 마다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사실 아이디어만 존재할 뿐 어떻게 작품으로 구현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원래 뭘 하겠다는 목표도 없고 계획도 없는 사람이에요. 하루하루, 그날그날의 일상을 충실하게 살아갈 뿐이지요. 원대한 포부를 가진 사람들을 난 신뢰하지 않아요(웃음).”

/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 사진=송은석기자

‘남한산성’ 원작자 김훈 /송은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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