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제신문은 지난 1960년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경제지다. 출범 57년 동안 경제 정책 수립의 조언자인 동시에 날카로운 비판자로서, 시장의 옹호자이자 감시자로서 경제 성장의 숨은 주역을 맡아왔다. 특히 개발 시대의 서울경제는 경제뿐 아니라 문화 창달과 스포츠 활성화, 국민 복리 향상에도 과감하게 지면을 할애해 사회 전 부문의 발전을 이끌어왔다.
신군부 정치군인들의 집권욕 아래 수많은 언론이 짓밟혔던 1980년 강제 폐간이라는 아픔도 겪었지만 서울경제는 1988년 복간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창간 정신인 ‘국민경제의 전체적 발전과 다수의 이익 대변’에 매진하는 한편 외환 위기(IMF 사태) 극복을 위한 ‘주식 갖기 운동’과 각종 사업을 통해 우리 경제의 순항과 경제 각 분야의 발전에 이바지해왔다.
서울경제는 우리나라 경제와 사회, 언론계에 네 가지의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첫째는 개발시대의 경제 개발을 선도했다는 점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개발 계획인 민주당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이 선보인 1960년이 서울경제의 탄생 시점과 같다는 점부터 서울경제와 경제 개발은 숙명적으로 이어져왔다고 할 수 있다.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된 이후부터 서울경제는 경제 정책의 제안자이자 감시자로서 선택과 집중을 통한 고속 성장을 이끌어왔다. 특히 창간 사주인 고(故) 백상 장기영 선생이 경제부총리로 지냈던 1964년부터 1967년까지의 3년5개월간은 우리 경제가 개발시대 중에서도 가장 빠르게 성장한 시기로 꼽힌다. 백상으로 상징되는 ‘경제개발을 통한 조국 근대화’라는 서울경제의 정신이 관료층과 금융계, 재계와 학계로 빠르게 전파되며 경제 개발과 성장을 가속한 셈이다.
두 번째는 경제 저널리즘을 최초로 선보였다는 점이다. 해방 직후부터 경제지를 표방한 매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면의 크기 등 형식은 물론 내용에서도 경제지로 간주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서울경제의 창간으로 우리 사회는 국제 수준과 비견할 수 있는 경제지 시대에 진입할 수 있었다. 서울경제 창간은 한국은행 조사부 등이 발간하는 자료나 몇몇 학회의 학술지를 제외하고는 전무했던 토양에서 경제 저널리즘을 꽃피우고 경제 발전으로 직결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세 번째로 서울경제의 등장은 언론 종사자와 기자직의 전문화를 낳았다. 일제 강점기에 태동한 한국의 근대 언론은 취재 분야만 분류돼 있었을 뿐 여전히 지사(志士)형 기자나 문필가형 기자들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정통 경제지인 서울경제의 창간으로 한국에서도 전문성을 갖춘 기자들이 활약하는 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서울경제는 특히 한국 언론 전체의 취재와 기사 작성 행태도 변화시켰다. 사건이나 정부 발표를 스트레이트 기사로 단순 보도하거나 기껏해야 가십(Gossip)성 기사를 작성하고 깊이가 요구되는 해설성 기사는 대학교수 같은 외부 전문가들이 맡던 당시의 언론 환경에서 서울경제는 기자들이 직접 해설기사를 작성하는 새로운 면모를 선보였다.
네 번째로 한국의 스포츠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창간 직후인 1961년 서울경제는 한 개 지면을 모두 스포츠 기사에 할애하는 스포츠판을 1969년까지 제작했다. 매일 한 개 지면을 스포츠 기사로 채우는 신문은 경제지는 물론 종합지를 통틀어 서울경제뿐이었다. 복간 이후에도 서울경제는 골프 기사를 집중적으로 보도해 우리나라 골프 경기력과 관련 산업 발전에 기여해왔다.
서울경제는 현재에도 서울포럼과 금융전략포럼 등으로 경제ㆍ금융을 포함한 우리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새로운 100년을 기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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