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실력으로 얻어낸 지도자 자리
현대 사회주의 국가 중 반세기에 걸쳐 지도자로, 게다가 아들과 손자까지 세계에서 유례 없는 일족 지배가 계속되고 있는 북한. 김정은의 동향에 세계의 눈길이 쏠리고 있지만 이제 북한의 초대 지도자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김일성 주변 인사에 따르면 그의 본명은 김성주로 1932년 무렵부터 김일성으로 개명했다. 그는 1912년 4월 15일 평양 교외 농가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김형직은 초등학교 교사로 기독교와 선교학교 일을 했다. 어머니 강반석도 열심한 기독교인으로 김일성도 어릴 때 교회에 다녔다.
김성주 외에도 가족으로 영주·철주 두 형제가 있다. 곤궁한 살림살이 때문에 가족은 1920년 만주로 이주했지만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김형직은 1920년 김일성을 데리고 남만주(중국 동북부)로 이주했다. 김일성은 거기서 초등학교를 나온 뒤 1926년 만주의 민족파 조선인독립운동단체 정의부가 운영하는 화성의숙에 입학했다. 그러나 얼마 못가 퇴학하던 그 해에 김형직은 32세로 타계했다.
김일성은 부친이 세상을 뜨자 길림육문(毓文)중학 2학년으로 편입하고 중학교 때 공산주의 관련 소조직에 참가했다.
김일성은 14세 때 길림에서 중국공산당청년조직의 마르크스 지하활동에 참가했고 경찰에 체포돼 수개월 감옥에 있었다. 그는 곧 석방됐지만 학교를 그만두고 만주의 게릴라부대에 들어갔다. 이 유격대는 중국인 총사령관의 동북항일연군에 통합돼 중국공산당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이 조직은 그 후 만주에 있던 일본관동군의 탄압을 받았고 김일성은 소련으로 도주한다.
일본과 전쟁 가능성을 염두에 뒀던 소련군은 일본인과 전투 경험이 있는 중국인 조선인부대를 결성했다. 김일성은 소련군 대위로 제1대대를 이끌었지만 종전까지 일본군과 전투도 없이 훈련만 받았다.
일본군과 10만 번의 전투
북한 공식 전기에는 김일성 장군이 1932~45년 일본군과 10만 번 전투를 벌여 모두 이겼다고 돼 있다. 하루 약 20회 꼴인데 이것은 후세의 지나친 각색이 아닐수 없다.
김일성을 일약 유명인으로 만든 전투가 있다. 최대 전과를 거둔 항일전으로 북한 역사에 새겨 넣은 보천보 전투. 보천보는 압록강을 관통하는 계림천에 접한 북한의 작은 마을이었다. 1937년 6월4일 오전 0시 김일성은 항일연군 제1로군 6사단 약 90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넌다. 오전 9시 다른 항일 멤버와 합류, 보천보를 급습했다. 보천보는 약 308가구와 순사 5명이 상주하는 산속마을. 김일성 등은 맨 앞에 있는 주재소를 습격했지만 경찰은 없었고 무기고에서 총을 탈취했다. 이 전투의 희생자는 엄마 등에 업힌 채 김일성 부대의 총탄으로 숨진 유아 1명과 일본인 요리점 주인 1명이었다. 김일성의 부대는 추격부대와 교전을 벌이면서 무사히 퇴각했다.
북한 공식문서에는 “항일유격대를 이끌고 1945년 8월 일본을 쳐부수고 개선장군으로 귀국했다”고 돼 있는데 이 또한 사실과 다르다. 김일성은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한 뒤 한 달만인 1945년 9월 소련극동군 대위로서 소련의 군용선을 타고 원산에 상륙했다.
김일성은 입국 후에 자기 친구인 빨치산파 간부를 지방으로 보내고 자기도 제철소를 방문하는 등 조직 만들기에 분주했다. 그런 활동은 먼저 도착해 있던 소련군과 협의로 승인을 받았다. (노동당 간부였던 박병엽의 증언)
소련군정의 이해와 맞아떨어진 김일성
10월 초순부터 소련군정 당국은 앞으로의 체제를 이끌 인물을 찾고 있었다. 북한 내에서 인기 있는 지도자는 없었다. 김일성이 북한에 도착한 직후, 그는 ‘소련군 환영 집회’(10월14일)에서 짧은 인사를 했다. 그는 불과 며칠 전에 조선공산당의 구성원이 되어 아직 북한의 지도자라고는 할 수 없었다.
김일성은 미국통치 하의 남부에 거점을 둔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공산당에서 이탈을 겨냥하고 있었다. 1945년 10월10일 평양에 조선공산당 북부조선분국이 설치돼 그해 늦게 김일성이 책임서기로 취임했다. 다음 해 5월에는 북부조선분국이 북한공산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그해 8월말 조선신민당과 합쳐 북조선노동당이 창당됐다.
소련 점령 하의 한반도 북부에서 잠정통치기관으로 1946년 2월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생기고 김일성이 소련군정 당국의 후원을 받아 위원장에 취임했다. 이렇게 해서 1946년 초까지 김일성은 형식적으로 북한의 지도자가 된다.
김일성은 소련에서 김정숙과 결혼했다. 둘 사이에 1942년 2월16일 블라디보스토크 근처 군 야영지에서 김정일이 태어났고 1947년에 차남이 태어났다. 북한에서는 김정일의 출생지를 북한 백두산의 산록이라고 돼 있다. 김일성은 한반도에서 일본군과 싸웠다고 하는데 아들이 소련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귀국 후 김일성과 처, 아이들은 평양 중심부 일본정부 소유의 작은 저택에 살았다.
김정숙 7세에 고아로…정일이 주도한 신격화
북한에서 크리스마스이브는 김정숙이라는 여성의 생일 기념일이기 때문에 고유의 축일로 돼 있다.
김정숙은 김일성의 아내로 김정일의 생모, 그리고 ‘3대혁명 장군’으로서, 여성으로선 최대급 찬사가 붙어 있다. 정숙은 32세에 죽었는데 고향인 함경북도 회령에는 생가가 기념관으로 남아 있고 거대한 동상도 세워졌다. 평양에는 그녀의 이름을 단 유치원까지 있다.
김정숙의 신격화는 김정일이 주도했다. 32세의 젊은 모친은 김정일이 8세 때 사망했다. 옅은 기억 밖에 없는 어머니를 이상적인 인물로 역사에 새기는 것은 어미를 잃은 마음의 공허함을 메우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정숙의 성장기를 전기를 통해 보자. 그녀가 태어난 곳은 북한 최북단에 위치한 마을 회령이다. 두만강을 끼고 건너편에 중국이 가까이 있다. 김정숙은 1917년 12월24일 가난한 농가에서 차녀로 태어났다.
1922년 6세 때 일가는 지주에게 돈을 빌려 중국 동북지방 옌지(延吉)로 이사한다. 당시 조선에서 먹고 살 수 없는 많은 북한 사람들은 먹을거리를 찾아 중국으로 건너갔다. 김정숙의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1928년에는 빌린 돈 대신에 언니가 지주의 하녀가 되었고 뒤에 죽었다. 부모도 일본군에 의해 살해당했고 남동생도 열네 살 때 전사했다. 공산당원이었던 오빠는 옌지에서 지하활동 중에 헌병대에 체포돼 죽었다. 정숙은 그후 16세에 빨치산 부대에 들어가 대일투쟁 생활에 접어들었다.
/고계연기자 kogy21@sedaily.com
-
[주] 최근 한반도 정세(외교 안보 등)를 좌지우지하는 핵심인물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이라 하겠다. 잇단 탄도미사일 발사와 6차 핵실험, 그리고 섬뜩한 말 폭탄 주고받기로 긴장과 전쟁 위기감을 키우는 두 사람. 이제는 ‘선전포고 주장’까지 나오는 일촉즉발 험악한 형국이다.
트럼프에 맞서는, 30대 초반의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은은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미치광이인가? 전략가인가? 그의 성장 과정과 인성 등을 들여다보고 북한의 과거 현재 미래 전반을 분석·예측해보는 일본 언론인 고미요지(도쿄신문 편집위원)의 원고를 입수했다. 국내 판권을 가진 서교출판사 김정동 사장이 번역서 출간에 앞서 콘텐츠 사용에 대해 양해를 해줬다. 일부 수정을 거쳐 정기적으로 옮겨 싣는다.
* 고미 요지(五味 洋治) :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쥬니치신문 서울지국에서, 2003년부터 2006년까지 중국총국에서 근무하며 북한 뉴스를 쫓아왔다. 올 2월 말레이시아에서 피살된 김정남과 7년 동안 주고받은 전자우편 대화록이 ‘안녕하세요, 김정남입니다’으로 지난 2013년 번역 소개되기도 했다. 현재 도쿄신문 편집위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60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