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선 리허설 땐 키스 안 하나요. 키스하세요. 더 애절하게. 배에서부터 감정을 끌어내요.”
국립발레단이 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선보이는 기념 공연 ‘안나 카레니나’ 연습이 막 시작됐을 때 내한한 안무가 크리스티안 슈푹 스위스 취리히 발레단 예술감독이 연습을 지켜보다가 소리쳤다. 발레리나와 발레리노가 실제 무대에서 애무하는 모습은 발레에 익숙한 관객들에게도 낯선 풍경. 하지만 무용수들의 완벽한 감정 연기가 드라마 발레를 완성한다고 믿는 슈푹 감독은 무용수들이 사랑하는 모습을 무대 위에서 보여주려면 강렬한 스킨십도 감수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실제로 이번 무대에서는 격정적인 2인무를 통해 주인공 안나 카레니나와 연인 브론스키의 정사 장면이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최근 찾은 서울 서초 예술의전당 국립발레단 연습실. 이날의 안나는 국립발레단의 수석 무용수 박슬기, 안나의 연인이자 젊은 장교 브론스키는 이재우였다. 모스크바 기차역에서의 첫 만남 이후 무도회에서 재회한 두 사람이 느리지만 활기차고, 부드럽지만 파괴적인 라흐마니노프 교향적 무곡 op.45 2악장에 맞춰 춤을 추자 모두가 숨을 죽인다. 박슬기의 눈빛에선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하고 욕망과 망설임이 손끝과 발끝으로 전해져 몸짓을 완성해낸다.
가장 눈길을 끈 장면은 안나의 친구 벳시의 살롱에서 장밋빛 드레스를 입은 안나와 브론스키가 격정적으로 펼치는 파드되(2인무)다. 벗겨진 드레스를 움켜쥔 안나와 그 위에 포개진 브론스키가 마치 살기 위해 사랑하는 이들처럼 한 몸이 되어 펄떡이는 장면은 현대 음악가 비톨트 루토스와프스키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체인3, 3악장 ’38‘이 어우러지며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국립발레단이 내달 1~5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하는 라이선스 신작 ‘안나 카레니나’는 기존 국내에서 선보였던 드라마 발레와 달리 ‘격정 멜로’라는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 2014년 스위스 취리히발레단에서 이 작품을 초연한 슈푹 감독은 1,200쪽에 달하는 대서사를 2시간짜리 발레 무대로 펼쳐내면서 클래식 발레부터 모던 발레, 드라마 발레를 아우르는 안무를 담았고 손 끝 하나 움직임부터 발의 움직임까지 모든 동작이 감정 표현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무용수들의 연기 훈련에 치중했다. 슈푹 감독은 “춤의 기교 뿐만 아니라 춤을 통해 설득력 있는 연기를 펼쳐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며 “드라마 발레에서는 발레 언어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무용수 하나 하나가 이야기를 전달하고 감정과 모순을 폭넓게, 생생하게 드러내며 인물을 창조해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나 카레니나를 발레로 선보인 기존 작품 대부분이 안나와 브론스키, 남편 카레닌을 둘러싼 질투 가득한 드라마를 따라가는 형식이라면 슈푹은 사회적으로 고립된 상류층 여성이 사랑으로 인해 몰락하면서 사회적으로 고통받는 모습을 충실하게 담았다. 이 과정에서 19세기 러시아 사회상이 고스란히 무대 위에 펼쳐진다. 독일에서 공수해온 발레 의상은 고전 발레 의상인 튀튀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독창적인 군무와 장면 구성도 돋보였다. 키티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한 레빈이 영지로 돌아가 마음의 상처를 잊고 농부들과 농사를 짓는 장면은 벼 베는 동작을 생동감 넘치는 발레 동작으로 표현했고 안나와 남편 카레닌을 비롯해 귀족들이 모여 승마 경기를 지켜보는 장면은 영상과 절도 있는 군무를 매치해 경쾌하게 꾸몄다.
상징을 발견하는 재미도 크다. 무도회보다는 농촌의 전원생활에서 더욱 생동감 넘치고 과감한 움직임을 보여주는 레빈은 그의 삶의 지향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몸짓으로 보여준다. 스토리의 전개에 따라 중간 중간 들려오는 기차 소리, 끝내 벼랑 끝에 몰린 안나를 죽음으로 이끄는 기차는 ‘등장인물들의 삶을 나아가게 하고 죽이기도 하는 운명의 열차’로서 이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상징이다.
슈푹은 이 작품을 위해 발레에 흔히 쓰는 차이콥스키 대신 라흐마니노프와 현대 음악가 루토스와프스키의 음악을 주로 썼다. 슈푹 감독은 “새로운 작품을 올릴 때마다 가장 시간과 공을 많이 들이는 과정이 바로 음악 선택”이라며 “안나 카레니나의 경우 러시아 음악을 염두에 두고 라흐마니노프의 모든 작품을 들었고 그의 음악과 강력한 대비를 이룰 곡으로 20세기 폴란드 음악가 루토스와프스키의 곡을 썼다”고 설명했다.
이 작품은 내년 2월 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문화올림픽 프로그램 중 하나로 특별 제작됐다. 이번 공연을 시작으로 내년 2월10~11일에는 강릉 올림픽아트센터에서 두 차례 공연된다. 이때는 올해 국립발레단 단원 강효형이 안무를 맡은 ‘허난설헌-수월경화’도 함께 선보인다.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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