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쳇바퀴를 돌던 한 평범한 중년 남자 모금산(기주봉)에게 생의 마지막 카운트다운이 탕! 시작됐다. 미스터 모는 일생일대의 계획을 세운다. 영문도 모른 채 미스터 모에게 소환된 영화감독 아들 스데반(오정환)과 아들의 여자친구 예원(고원희)에게 자작 시나리오 ‘사제 폭탄을 삼킨 남자’를 던진 것.
● 삶의 감각이 깨어나는 순간
14일 개봉을 앞둔 천국보다 낯선 블랙코미디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이하 메크모)는 삶의 감각을 일깨우는 영화이다. 무엇보다 10대 어린 관객도 40~50대 중년 관객들 모두의 무뎌진 감각을 간지럽힌다. 관람 문턱 역시 높지 않다. 임대형 감독은 “상업영화와 아트영화의 중간 지점에 있는 영화이다” 며 “후문으로 들었을 때 반가운 이야기 중 하나가 무성 영화를 보면서 어린이 관객들이 깔깔 대면서 웃었다고 할 때 제일 기분 좋았다”고 말했다.
모금산은 닥쳐온 죽음의 위기 앞에서 갑자기 생의 감각을 되찾는다. 오직 면벽하고 혼(자)맥(주)을 즐기던 그가 수영장 메이트 ‘자영’(전여빈)을 자신만의 루틴의 세계에 초대한다. 나아가 오래 전 깊숙이 처박아 두었던 젊은 날의 자신의 꿈을 일상으로 소환하며, 이전보다 더 활력적인 하루하루를 만들기 시작한다.
이렇듯 ‘메크모’는 생의 마지막을 앞두고, 일생의 찬란한 모멘텀을 만들어 하루를 영원처럼, 영원을 하루처럼 클라이맥스에 도달하려는 한 남자의 집념의 분투기이다. 이 분투기의 중심엔 배우 기주봉이 있다. 중견배우 기주봉이 찰리 채플린을 동경한 시골 이발사 모금산으로 분했다.
● 채플린 모금산, 외로운 자영, 덜 떨어진 치킨놈을 만나다
기주봉의 ‘바냐 아저씨’ ‘관객 모독’ 등 여러 편의 연극은 물론 수 많은 영화를 봤다고 한 임대형 감독은 “이미지와 연기 모두 모금산과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어 직접 대학로로 찾아가 캐스팅 제안을 했다”고 했다. 추가로 기주봉 기국서 형제와의 ‘채플린’ 관련 일화도 전했다.
“기국서 선생님이 ‘메크모’ VIP 때 오셔서 영화를 보고 가셨다. 영화 캐스팅 할 당시, 우연치 않게 기국서 선생님이 채플린 평전을 읽고 계셨다고 들었는데, 돈독하신 형제분들이라 그런 면들이 동생 기주봉 선생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또 동생에게 칭찬을 잘 안하시는데 이번엔 연기 칭찬을 해주셨다고 들었다. 그래서 기주봉 선생님이 더 좋아하셨다고 하더라.”
모금산의 일기에 따르면 자영은 ‘외로운 사람’이다. 서울 출신으로 직장 때문에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시골에서 살고 있는 평범한 은행원 자영은 모금산과 34세 나이차가 무색하게 친밀한 우정을 나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죄 많은 소녀’(감독 김의석)로 ‘올해의 배우상’을 수상하며 주목받은 배우 전여빈은 자영 그 자체였다.
특히 ‘메크모’에서 영화의 톤 앤 매너를 가장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불의 이미지와 물의 이미지가 충돌하며 만들어내는 변증법적 코미디 구성을 만들어내는 데 도움을 준 일등공신이다.
임대형 감독은 “오디션을 통해 만난 전여빈 배우는 배우로서의 매력도 있지만, 매력적인 인간이란 생각이 들어 어떤 역할이든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털어놨다.
“여빈씨는 촬영장에서 가장 많은 고생을 했던 배우이다. 자영(전여빈)이 수영장에서 홀로 입에 물을 뿜어내는 쇼트를 가장 좋아하는데, 테이크도 가장 많이 갔다. 수영장에서 하루종일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서 되게 고생을 하셨다. 열정이 정말 많은 배우이다. 어떤 역할을 맡아도 그 사람이 하면, 책임감 있게 해내서, 그 캐릭터 이상으로 해 내는 배우인 것 같다.“
‘치킨집은 덜 떨어진 놈 같다. 책에 파묻혀 뒤질 놈이다.’ 유재명 배우가 맡은 ‘치킨집’이란 캐릭터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모금산의 일기 한 부분이다. 영화 속에서 유재명 배우는 단 한마디 대사도 없이 수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임대형 감독은 “‘치킨집’은 모금산과 싫든 좋든 익숙하게 만나는 친구 같은 사이이다”고 설명했다. 물론 애초부터 대사를 주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다. 임 감독에 따르면 “캐릭터에 대해 쓰고 나니 대사가 없었다”고 한다.
“모금산과 치킨집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매일 보는 친구가 아닐까, 친구 관계는 말이 필요없으니까. 없으면 허전하고, 그런 관계로 비춰지면 좋겠다 싶었다. 대화를 통해서 맺어지는 관계가 아니라 계속해서 날마다 이어지는 만남이라고 생각했다. 유재명 선배님도 대사 없는데 개성이 있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단호하게 대사를 뺐다.”
● 흑백영화에 신의 축복을...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란 다소 긴 제목을 타이틀로 정했다. 감독은 좋아하는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 짐자무시 감독의 영화도 많이 봐서 그 영화들의 영향을 좀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커트 보넨거트의 ‘갓 블레스 유, 미스터 로즈 워터’ 라는 소설 제목에서 착안해 원래 영화의 제목을 ‘갓 블레스 유 미스터 모’ 로 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 속 배경이 크리스마스가 있다는 점이 눈에 들어와 결국 최종 제목은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모’가 됐다.
흑백 영화인 ‘메크모’는 관객들에게 아날로그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이발 가위와 면도칼, 이발소의자와 연탄 난로가 놓인 시골의 오래된 ‘마을이발소’의 소소하고 느릿한 풍경 역시 영화의 아날로그적인 정서와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시나리오를 쓰면서도, 프리프로덕션 과정에서도, 프로덕션 과정에서도 ‘메크모’의 세계는 언제나 흑백으로 구성돼 있었다. 어떤 논리를 만들어서라도 지켜야 하는 것이었다. 또한 기주봉 배우의 마스크가 흑백과 절묘하게 어울린다는 점 또한 감독이 흑백으로 영화를 찍어나간 이유이기도 했다. 촬영은 결코 쉽지 않았다. 흑백영화란 설정은 감독에게 색보다는 패턴, 음영으로 입체감을 줘야 하는 숙제를 안겼다.
“흑백 영화였기 때문에 바닥 장판부터, 벽지 테이블보, 식탁보, 배우들의 의상까지 패턴을 신경을 많이 썼다. 돈을 많이 들여서 촬영을 했다면 흡족했을 텐데 저예산 영화라 그런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그런 쪽에서 최선의 선택을 해서 최선의 결과물을 내야했다. 색이 없기 때문에 잘못하면 진하거나 연하게 보이게 된다. 미리 계산하지 않으면 흑백에서, 의상이 배경에 묻히거나, 어떤 소품에 묻히거나 그런 게 많았다. 늘 선택의 연속이었다.”
● 한국의 찰스 슐츠 임대형 감독...“성실하게 한편, 한편 계속 찍고 싶어요”
1986년생으로 충청남도 금산 출생인 임대형 감독은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를 졸업했다. 단편영화 ‘레몬타임’(2013)으로 데뷔 후 단편 ‘만일의 세계’(2014)로 제13회 미쟝센단편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제40회 서울독립영화제 우수작품상을 수상하며 호평 받았다. ‘메크모’는 그의 첫 장편 연출작으로,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 뉴 커런츠 부문(2016)에 초청되어 넷팩상을 수상하는 등 카를로비바리, 프랑크푸르트, 부에노스아이레스 등 해외 유수의 영화제의 러브콜이 이어지고 있다.
실제로 만나 본 임대형 감독은 ‘성실하다’는 단어가 잘 어울렸다. 시간을 정해 놓고 성실하게 글을 쓰는 타입인 그는 “현실을 외면하는 영화는 찍고 싶지 않다. 현실 그 안에서 서로 공기를 나누고, 그러면서 다들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닌가”라며 아직은 자신의 색을 이야기하기엔 조심스럽다고 했다.
그가 존경하는 예술가는 스누피가 나오는 만화 ‘피너츠’의 작가인 찰스 슐츠이다. 몇 십년간 단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그림을 연재한 ‘성실함’은 임 감독이 늘 배우고 싶은 부분이라고 한다.
“전 타고난 재능이 없다. 그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늘 노력을 하는 편이다. 미리 계산을 하고 합을 맞춰놓지 않으면 현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 두렵다. 영화를 많이 찍은 사람이라면, 다가오는 우연들을 현장에서 컨트롤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텐데 아직은 경험치가 부족하다. 성실하게 노력하는 수 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메크모’는 A부터 Z까지 엄청난 배움과 깨달음을 경험할 수 있게 해준 영화다. 모든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감사했지만 특히 기주봉 배우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영화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알게 했다고 한다. 현장에서 기주봉 배우는 임 감독에게 “너는 좀 더 비뚤어지면 좋을 것” 이란 말을 했고, 이 말은 감독의 마음에 닿았다고 한다.
“그 전까지 망설이는 부분이 많았다면, 이번 영화는 그런 부분이 다소 줄었다. 워낙 많은 것을 배운 영화였다. 기주봉 배우가 신인 감독과의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디렉션을 전적으로 신뢰했고, 기주봉 배우의 이러한 면이 스태프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쳤다. 선생님 덕분에 모두가 한 편의 같은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기주봉 선생님에게 인간적인 면에서 많이 배웠던 걸 잊을 수 없다.”
/서경스타 정다훈기자 sestar@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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