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간대 MBC에서 ‘20세기 소년소녀’, SBS에서 ‘사랑의 온도’로 로맨스 장르를 선보일 때 KBS에서는 과감하게 ‘마녀의 법정’으로 법정수사극을 선택했다. 그리고 이러한 차별화 전략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초반 ‘사랑의 온도’가 선전하더니 후반에는 ‘마녀의 법정’이 자체 최고 시청률 14.3%로 동시간대 1위와 함께 유종의 미를 거두며 종영한 것.
‘마녀의 법정’은 공분을 일으키는 현실 반영 소재가 힘 있는 극본으로 담겨 시청자들에게 공감을 일으켰다. 여기에 인생캐릭터를 경신한 정려원의 사이다 마이듬 캐릭터 변신, 윤현민의 섬세하면서 정의로운 여진욱 검사로의 열연이 보기 좋게 호흡을 완성시켰다.
최근 서울 강남구 신사동 한 카페에서 만난 윤현민은 ‘마녀의 법정’의 성공을 화두로 꺼내자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전작 ‘터널’이 잘 끝났던 게 생각난다. ‘터널’ 때 끝나고 감독님을 부둥켜안고 울면서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그 때는 고생했던 게 보상을 받는가보다 했다. 이번 ‘마녀의 법정’까지 잘 되니 ‘운이 정말 좋구나’ 싶더라. 야구할 때도 한 번 홈런은 돼도 연타석은 되기 힘든데 좋아서 소리도 질렀다”고 말했다.
사실 ‘마녀의 법정’은 방영 전, 이 정도의 기대작이 될 줄 몰랐던 분위기였다. 그러기에 ‘웰메이드 드라마’라는 평가에 더 큰 기쁨이 따랐을 터. “KBS 월화극이 이전까지는 성적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MBC와 SBS에서는 동시간대에 로코로 기대작을 내놓았다. 우리는 베스트셀러가 아닌 스테디셀러로 만들자고 했다. 나중에라도 입소문으로 우리 드라마를 찾게끔 만들고 싶었다.”
‘마녀의 법정’에서 윤현민이 연기한 여진욱은 소아정신과 출신 초임 검사로, 진술증거가 대부분인 성범죄사건에서 피해자들의 입장에 이입할 줄 아는 전담검사로 활약했다. “‘터널’ 때처럼 검사 직업에 대한 리서치를 많이 했다. 성범죄 전담 검사님들을 많이 만났는데, 촬영 들어가기 전에는 그저 조언을 받는 기분이었다면, 모든 회차가 끝나고서는 검사님께서 힘든 일을 하고 계셨구나 생각하면서 인간적으로 내가 성장했다고 느꼈다. 예전에는 ‘아동 성범죄’ 단어가 들어간 기사 제목을 보면 마음이 무거워서 잘 클릭하지 못했다. ‘마녀의 법정’을 하고나서는 되게 많이 관심을 가지게 됐다. 판결 사례에 귀 기울이게 되더라. 사회 최약자인 아동과 여성을 향한 사건은 인간의 가장 밑바닥을 보여주는 사건인 것 같다.”
드라마는 마이듬 친모의 사연을 큰 줄기로 삼으면서 에피소드 형식으로 전개를 펼쳐 나갔다. 여교수의 남조교 강간 미수 사건, 몰카 피해, 청소년 성매매 등 사회적 공분을 자아내는 생활밀착형 성범죄들을 다수 다뤘다. 여진욱은 각종 케이스를 처리하면서 내적으로 수차례 괴로워했다.
“아동 성범죄를 다룬 5부가 제일 힘들었다. 작가님께서 5부는 진욱이가 왜 의사에서 검사가 됐는지를 그리며 그의 회차가 될 거라고 하셨다. 대본만 봐도 너무 괴로웠고, 너무 안 좋은 사건이어서 다루기 조심스러웠다. 3, 4부 때부터 드라마가 오름세를 가고 있어서 5부에서 내가 치고 올라갈 수 있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감을 5회 때 찾을 수 있었다. 감독님께서 나와 의견을 이야기하다가 눈물을 왈칵 쏟으셨다. 아마 자식이 있으셔서 괴로우셨던 것 같다. 피해자 입장에서 괴로움을 느끼고 개선점을 찾는 그 모습이 우리 드라마의 방향성이라 생각했다.”
여진욱은 온화한 얼굴에 섬세함을 지니면서 사건 앞에서는 공정함과 냉정함을 드러내는 인물이었다. 실제 윤현민과는 어느 정도 유사했을까. “여진욱을 연기하면서 편했던 게 있다. 여태까지 해온 캐릭터들 중에서 실제의 나와 가장 비슷했다. 캐릭터를 위해 날카롭거나 통통 튀는 게 아니라 조곤조곤하게 내 목소리를 가져올 수 있었다. 내가 생각은 빨라도 몸은 느린 편인데, 그런 행동도 실제 내 모습을 가져왔다. 예전부터 생각했던 게, 여러 드라마에서 남자가 여자를 강제로 다루는 장면이 있는데 그런 걸 안 좋아한다. 그게 로맨틱한 줄 모르겠다. ‘마녀의 법정’은 내가 싫어하는 그 부분을 행동하지 않을 수 있던 드라마였다.”
그러면서 윤현민은 마지막회에서 보인 자신만의 섬세한 애드리브를 밝혔다. “이 드라마가 해피엔딩으로 끝날 거라는 건 기획의도 때부터 알았다. 16부 대본이 나오기 전에 작가님께 전화를 드렸다. 해피엔딩을 그저 로맨스로 보여주면 절대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해서 작가님께 말씀 드린 게 있다. 핸드폰에 ‘마이듬♥’이 아니라 ‘MY듬’으로 이름을 설정해 놓는 게 진욱이답겠다고 했다. 진욱이는 자신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데, 설레였던 진욱이의 모습을 ‘MY듬’ 정도로 보여줄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마이듬은 과감하고 칼 같은 성격으로 불의에 맞서 ‘핵직구’를 날리는 걸크러시 검사였다. 이는 정려원의 시원시원한 열연으로 실감나게 표현됐다. 섬세한 여진욱과 거침없는 마이듬은 남녀가 바뀐 듯한 이미지로 성역할 고정관념을 탈피했다. “많이 통쾌했다. 진욱이는 통쾌한 한 방을 먹이는 인물이 아니었다. 려원 누나는 사실 마이듬과 완전 정반대다. 그동안 누나의 필모를 좋아했다. 예쁜데 예쁜 척 안 하고 나이브한 연기를 보여줘서 로망을 가졌다. 그런데 막상 실제로 보니 너무 수줍음도 많고 조용조용한 성격이었다. 누나가 자신의 그런 성격을 애초부터 알려주면서 ‘나는 이런 여자(마이듬)가 되고 싶어’라고 하셨다.”
상대배우 정려원의 완벽한 역할 소화에 고마움을 드러내면서 윤현민은 여아부(여성아동범죄 전담부) 식구들, 그 밖의 출연진에 대해 애틋함을 보였다. “누나를(정려원) 만난 것도 최고였던 것 같고 모든 선배들, 여아부 식구들 다 너무 좋았다. 좋은 사람들끼리 만나면 좋은 작품이 나오는 건 불문율인 것 같다. 세트장이 화성에 멀리 있어서 려원 누나와 나는 거의 집에 못 가면서 촬영을 했다. 그러다 보니 여아부 팀과 한 가족이 된 느낌이었다. 우리 팀은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연말 시상식 때 가능하다면 여아부 식구들 다 모여서 누구라도 수상을 축하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 수상자가 적어도 려원 누나가 됐으면 좋겠다.”
윤현민에게 ‘마녀의 법정’은 운명과도 같은 작품이었다. ‘터널’이 끝나고 무조건 로코를 해야겠다는 갈망이 있던 시기에 로코 위주의 대본을 보다가 ‘마녀의 법정’을 보고 법정물이라 로맨스가 없겠지만 안 할 이유가 없다고 느꼈다. “작가님께서도 내 그간의 필모로 봤을 때 로코가 하고 싶을 거라고 생각해서 거절할 줄 알았다고 하셨다. 이제 로코도 하고 싶다. 내가 날카롭게 생기고 운동한 경력이 있기 때문인지 지금까지는 남성적인 역할이 많았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노팅힐’과 ‘연애의 온도’ 같은 소소한 이야기의 연애물이다. ‘연애의 발견’ 에릭 형 같은 역할도 해보고 싶다.”
이제 막 지상파 주연을 꿰찼으니 윤현민에게는 더욱 박차를 가할 시기다. 앞으로 어떤 연기를 보여줄까. “나는 스스로를 못 살게 구는 타입이다. 낙천적인 사람이 부럽다. 나는 안주하지 말고 더 하고자 한다. 그래서 지난 주말에 ‘연기 수업’이라는 이론책을 다시 들여다봤다. 얼마 전에는 청룡영화제에서 조연상을 수상하신 진선규 선배님의 인터뷰를 보고 되게 울컥했다. 그 분의 눈물 하나로 지금까지의 연기 인생이 설명이 된다고 생각했다. 순수하게 작품에 내던질 수 있는 용기가 잔상으로 되게 오래 남았다.”
“나도 일을 3년 정도 쉬지 않고 했지만 연기에 있어서 ‘익숙함’이라는 게 생기더라. 지금까지는 내 실력에 비해 운이 좋았다면 다음에는 그 정도 운을 감당할 수 있는 실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과거에 실패도 많이 했었다. 그래도 그만큼 경험이 생긴 게 장점이겠다. 내 차기작도 운이 좋을 거라고 희망한다.”
/서경스타 한해선기자 sestar@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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