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9년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 ‘디스트릭트9((District 9)’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불시착한 외계인을 그렸다. 외계인들은 요하네스버그 인근 ‘디스트릭트9’에 수용돼 28년간 인간의 통제를 받으며 살아간다. 격리지역이 무법천지로 변하자 강제철거를 결정한 외계인관리국(MNU). 철거 책임자로 온 비커스가 외계 물질에 노출되는 사고를 당해 외계인으로 변해가면서 흥미진진해진다. 비커스가 외계 신무기를 가동시킬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는 것을 파악한 MNU는 그를 잡아 학대한다. 온갖 고문 끝에 비커스에게서 신무기 제조법을 알아내는 데 성공한 MNU. 신무기를 만들어 외계인을 죽이는 실험까지 한 후 쾌재를 부른다.
이 영화에서 신무기는 ‘외계인을 고문해서 얻어낸 전리품’이다. 요즘에도 상식적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과학기술 제품이나 최첨단 무기가 개발됐을 때 빗대서 쓴다. 연구개발(R&D)과 같은 정상적인 노력을 통해 기술을 개발한 게 아니라 외부 세계로부터 쉽게 확보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SF영화 등에서 그려지듯이 외계의 기술이 인간 세계를 능가하고 외계인이 상상 이상의 기술력을 가졌을 것이라는 인식이 바탕이 깔려 있다. 특히 외계 첨단 기술을 동경하고 전수받기를 고대하는 인간의 바람이 녹아 있지 싶다.
‘외계인 고문’ 얘기가 가장 설득력 있게 전파된 때는 1950~1960년대. 당시 이뤄진 인류의 놀라운 기술진보를 두고 1947년 미국 뉴멕시코주 로스웰 공군기지 부근에 추락한 것으로 알려진 미확인비행물체(UFO) 관련설이 나돌았다. 이전에 없었던 엄청난 기술 발전이 추락한 UFO와 외계인들로부터 얻어낸 것이라는 소문이다. 미국 정부의 ‘사실무근’ 부인에도 인류의 기술 발전과 외계인의 연관성 주장은 여전히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미국 정부가 외계인과 접촉하거나 추락한 UFO를 역공학(Reverse Engineering)해서 기술을 발전시키고 있다는 일종의 음모론이다.
음모론에 오르내리는 사례는 티타늄·광섬유·트랜지스터·레이저 등이 대표적이다. 공교롭게도 모두 1950년대를 전후해 획기적인 진전을 이룬 것들이다. 티타늄은 1791년 발견됐지만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가 1950년 이후 군용 항공기 공정에 사용되기 시작한 게 외계인 고문설을 부추겼다. 광섬유 역시 첫 시연된 지 한참 뒤인 1958년 상용화됐다. 트랜지스터의 경우 과학자들이 만들 엄두도 못 내다가 로스웰사건 이후 완벽한 트랜지스터가 탄생했다. 레이저도 1960년 이전에는 비슷한 흉내조차 어려웠으나 갑작스레 등장했다. 마이크로 칩 이론 연구(1952년), 원격제어기술 개발(1955년) 등도 외계인 전리품으로 분류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종종 ‘외계인 고문’ 얘기가 나온다. 단골 회사는 반도체 세계 1위인 삼성전자다. 지난달 27일 삼성전자는 기존 리튬이온 전지보다 충전 속도가 5배 이상 빠른 배터리 소재 ‘그래핀 볼’을 개발했다고 밝혔다. 기존 배터리는 고속충전 기술을 사용해도 완전충전에 1시간 가까이 걸리지만 새 배터리는 12분이면 가능하다고 한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네티즌들은 “삼성전자가 또 외계인 학대를 했나?” “외계인 고문이 또 일어났다” “외계인한테 쓴 약만 얼마냐” 등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처럼 대다수 우리 기업들은 ‘외계인 고문’급 기술개발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외국에서 놀라움과 찬사가 쏟아지기도 한다. 그런데도 정부와 정치권은 칭찬과 격려는커녕 법인세 올릴 궁리하고 대기업 R&D 세액공제는 축소하는 등 ‘혼내주기’에 바쁘다. 혁신성장을 하자면서 그 핵심인 규제를 푸는 것은 미적거리고 있다. 지금 각국은 투자 증대와 일자리 확대를 위해 기업들의 기(氣)를 살리는 데 열심이다. 세금을 깎아주는 것도 모자라 이런저런 인센티브를 주며 투자를 독려하고 있다. 이렇게는 못하더라도 스스로 ‘외계인 고문’이라도 잘하도록 기업들을 간섭 말고 가만히 놔두는 게 옳지 않겠나. shi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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