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수아 작가처럼 훌륭한 작가의 이야기를 영어로 전할 수 있게 된 것은 엄청난 영광입니다. 한국 작가들 고유의 문체, 주제의식은 소설을 쓰고 있는 제게도 교본이 됩니다. 배수아 외에도 한국의 훌륭한 여성 작가들을 영어권에 소개하고 싶습니다.”
배수아의 단편 소설 ‘도둑 자매’로 GKL문학번역상 우수상 수상의 영예를 안은 자넷 홍(37)은 11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GKL문학번역상’ 시상식장에서 기자들과 만나 “번역가들을 움직이는 힘은 내가 이 작품을 반드시 번역해야만 한다는 열정, 팬의 감정”이라며 “번역의 욕구를 들끓게 하는 숨은 보석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좀 더 많아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캐나다 교민인 홍 씨는 지난해 서울국제작가축제에서 배수아의 새 단편 ‘노인 울라(Noin Ula)’의 번역작업을 맡게 된 것을 계기로 배 작가의 작품을 본격적으로 번역하게 됐다.
평소 소설을 번역할 때 원작자와 깊이 소통하는 홍 씨는 배 작가와도 이메일로 소통하며 원작자의 의도를 충실히 담아냈고 홍 씨의 노고를 높이 평가한 배 작가는 홍 씨에게 출간을 앞두고 있던 소설집 ‘뱀과 물’의 번역 작업을 맡기게 됐다. 이번에 수상작으로 선정된 ‘도둑 자매’는 그중 일부다.
캐나다 브리티시 콜럼비아 대학에서 아시아학을 전공하며 우연히 ‘한국 문학 번역 프로젝트’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홍 씨는 2001년부터 한국문학을 영어권에 꾸준히 소개하는 전문 번역자로 활동했다.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맨부커상을 수상하는데 공을 세운 번역자 데보라 스미스보다 앞서 ‘채식주의자’를 영문으로 번역했던 사람도 홍 씨다. 홍 씨는 “2010년 번역 작업을 모두 마쳤고 일부는 미국 하버드대학 한국학연구소가 발행하는 영문 문예지 ‘아젤리아(AZALEA)’에 소개됐다”며 “하지만 출판사마다 ‘작품이 지나치게 어둡다’며 출간을 주저했고 결국 고배를 마셨다”고 털어놨다.
3살 아이의 엄마로 육아를 병행하고 있지만 홍 씨는 소설 집필과 번역 작업을 꾸준히 하고 있다. 올해 한유주의 장편소설 ‘불가능한 동화(the Impossible Story)’를 번역 출간했고 내년 상반기 제44회 앙굴렘국제만화축제 ‘새로운 발견상’(Prix revelation) 수상작인 앙꼬의 ‘나쁜 친구(Bad Friends)’ 하성란의 소설집 ‘옆집 여자(The Woman Next Door)’의 영어판 출간도 앞두고 있다. ‘도둑자매’가 수록된 배수아의 소설집 ‘뱀과 물’도 앞으로 1년간 번역할 계획이다. 홍 씨는 “하성란, 배수아, 한유주, 김숨의 소설은 물론 앙꼬의 그래픽 노블도 꾸준히 번역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번 시상식을 계기로 홍 씨는 17년만에 한국을 찾았다. 두 번째 장편 소설 ‘왓 더 시 홀즈(가제·What the sea holds)’ 집필에 앞서 제주도 우도에서 해녀들의 삶을 취재하기 위해서다. 홍 씨는 “이미 8년에 걸쳐 집필을 마친 장편 소설 ‘페인티드 윈도우’와 함께 현재 작업 중인 책도 조만간 출간할 계획”이라며 “번역가가 아닌 소설가로도 한국 독자들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며 웃었다.
한편 GKL문학번역상은 한국문학의 세계 진출 활성화에 기여하고자 지난 7월 공익법인 GKL사회공헌재단이 처음 제정한 상이다. GKL사회공헌재단이 후원하고, 한국문화유산교육연구원이 주관한 이번 공모전에 44건의 작품이 접수됐고 예비심사를 거쳐 8건, 본 심사를 통해 최종 3명의 수상자를 선정했다.
대상에는 아그넬 조지프(33) 씨의 ‘근처’(박민규 작), 최우수상에는 신인 번역자인 성은지(36) 씨의 ‘영원한 화자’(김애란 작)가 선정됐다. 인도 출생인 아그넬 조지프 씨는 네루대 한국어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에서 경희대 한국어학당, 한국문학번역원 번역아카데미 5기 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한국문학번역원에서 근무하며 번역 일을 병행하고 있으며 제12회 한국문학번역신인상, 44회 코리아타임즈 주최 한국문학번역상 대상을 받았다. 조지프 씨는 ‘근처’가 수록된 박민규의 단편집 ‘더블’로 대산문화재단에서 번역 지원을 받고 있다.
조지프 씨는 “끝내주는 유머와 예측 불가능한 이야기, 번뜩이는 언어유희, 행간에 감춰진 미학이 돋보이는 박민규의 문체는 한국 문학에서도 독보적”이라며 “번역을 하다 보면 자괴감에 빠져 이 힘든 일을 왜 자진해서 하고 있을까 머리를 쥐어박을 때도 있지만 박민규처럼 보석 같은 작가와 작품이 더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멈출 수가 없다”며 수상 소감을 전했다.
수상자 중에는 문학 번역에 처음으로 도전한 직장인도 있었다. 차병원그룹에서 통역 업무를 맡고 있는 성은지(36) 씨는 “문장을 제대로 옮기기 위해 단어 하나하나를 공들여 고르고 수십 번씩 고쳐 쓰면서 내 선택을 계속해서 의심하는 과정은 한편으로는 고통스러웠지만 작가의 목소리를 대신하며 작품 속 화자와 공감을 넘어 일체가 될 수 있다는 경험이라는 점에서 특별했다”며 “앞으로 ‘달려라 아비’를 전문 번역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날 시상식에는 원작자로는 유일하게 배수아 작가가 참석했다. 배 작가는 “나 역시 독일어 책을 한국어로 옮기는 번역가로서 번역에 관심이 많은데 번역본은 원작과는 독립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며 “자신의 언어로 아름답게 번역해준 모든 번역자들에게 감사하고 싶어 시상식장을 찾았다”며 수상자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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