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의 분노를 아시나요.’
저녁이 있는 삶이 좋지만 근로시간 단축 소식이 반갑지만도 않은 사람이 90%에 속한다. 중소기업에서 일하거나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못한 사람의 비율이다. 이들은 법으로 근로시간이 단축되면 소득이 줄까 먼저 걱정한다. 정부와 정치권은 근로시간 단축이 여론의 다수라는 점을 내세우나 진실을 외면하고 있다. 소득이 감소해도 근로시간 줄이는 데 찬성하는 여론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감추고 있다. 대기업 근로자를 대변하는 노동계 눈치를 보면서 근로시간을 줄이려면 생산성이 올라가야 한다는 진실은 말하지 않는다. 근로시간을 강제로 단축하면 문 닫을 수밖에 없는 중소기업에 실효성이 없음을 알면서도 지원금과 세제혜택을 준다면서 위선이나 부리고 있다.
이게 민주주의인가. 300인 이상 대기업과 그 미만인 중소기업 근로자 또는 노조 가입과 비(非)가입 근로자의 비율은 10대90이다. 민주주의는 민의를 대변하고 유권자 분포도에서 50%, 즉 중간투표자의 이익은 민의에 가장 가깝다. 법정 근로시간 단축은 상위 10%를 대변하고 하위 90%를 배제한 입법이다. 민주주의가 대표성의 원리에 반하면서도 유지되는 것은 정보의 왜곡에 있다. 노동계는 근로시간을 단축하면 일자리가 증가한다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노동운동에 불이 붙은 지난 1990년대 이전에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근로자 비율은 4대6 정도였다. 그러나 근로시간이 짧아진 대기업의 고용비중은 무려 4분의1 정도로 격감한 반면 근로시간이 여전히 긴 중소기업 고용비중은 오히려 크게 증가했다. 대중소기업 간 격차가 커져 대기업 일자리를 원하는 청년은 헬조선과 흙수저를 말하며 분노하고 중소기업은 외국 인력에 기대어 연명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법으로 근로시간을 줄이는 것이 정상인가. 근로시간이 짧은 독일 등 유럽 국가는 대부분 노사 협력으로 줄였다. 근무형태와 근무방식 등에서 유연성을 높이고 시간당 생산성을 높였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예외적으로 법으로 근로시간을 단축했는데 실업률이 치솟고 성장과 소득분배가 악화하자 도로 늘렸다. 근로시간을 포함해 노동 규제가 심한 이탈리아는 사업주가 법을 아예 회피해 고용불안이 더 커지는 규제의 역설에 시달린다. 우리나라와 다른 의미의 비정규직 문제인데 예컨대 10명 고용하는 사업체가 8명만 신고하고 2명은 신고하지 않아 비신고 근로자는 고용안정은 고사하고 사회복지제도의 혜택도 받지 못한다.
정말 중소기업 중심 경제인가. 유럽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고용비중이 4대6 정도로 우리보다 훨씬 높다. 그런데도 유럽은 근로시간 등 모든 규제정책의 기준을 중소기업에 둔다. 유럽연합(EU)은 ‘중소기업을 먼저 생각한다(Think Small First)’를 규제정책의 원칙으로 채택하고 중소기업에 대해 규제 적용의 예외나 단계별 적용조항을 활용한다. 유럽이 미국에 비해 노동시장이 경직돼 경기회복이 둔하고 고실업 문제 해결도 어려운데다 중소기업의 고용을 늘려야 하지만 규제의 부담은 대기업보다 중소기업이 크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대기업을 염두에 둔 규제를 중소기업에 그대로 적용하면서 중소기업 중심 경제를 말하는 것은 국민을 기만하는 것과 같다.
근로시간은 어떻게 줄여야 할까. 정부가 노동계의 요구대로 근로시간을 단축하고 대기업은 근로자의 소득을 유지해주고는 부담을 협력 중소기업에 전가하는 식의 노사정 담합 구도부터 깨야 한다. 이런 구도에서는 중소기업의 경영이 악화돼 근로시간이 줄기 어렵다. 노동계와 정부의 자성이 필요하다. 노동계는 커진 정치적 영향력에 걸맞게 사회적 책임도 떠맡아 생산성을 높이는 데 앞장서고 사업주는 탄력적으로 근로자가 재량에 따라 근로시간을 알뜰하게 활용하도록 자유를 줘야 한다. 정부는 중소기업이 근로시간을 줄이면 자금지원과 세제혜택을 주는 식의 타성적 정책이 아닌 이에 필요한 노하우를 키우도록 인적자원관리를 지원하는 현장 중심의 적극적 고용노동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
김태기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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