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은 1987년 1월, 스물두 살 대학생이 경찰 조사 도중 사망하고 사건의 진상이 은폐되자 진실을 밝히기 위해 용기 냈던 사람들의 가슴 뛰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6월 민주항쟁을 재조명해 당시의 군부독재를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러면서 ‘광장의 힘’이라는 메시지로 2017년 ‘촛불민심’을 관통했다.
김윤석은 ‘1987’에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은폐를 지시하는 대공수사처 박처장으로 분했다. 평안남도 출신으로 월남 이후 빨갱이라면 치를 떨고, 차가운 이성과 강한 권위를 보여준다. ‘폭압의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 장준환 감독이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에 이어 김윤석을 또 한 번 ‘괴물’로 만들었다.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김윤석은 “영화가 흥미진진하다. 정성껏 만들었는데 좋은 반응이 나오면 감사하겠다”고 ‘1987’의 완성도에 자부심을 보였다. 최근 시사회에서 영화를 처음 본 소감으로는 “내가 눈물이 날 수밖에 없는 세대다. 계속 울다가 보면서 집중하고 그랬다. 배우들도 모두 옆에서 훌쩍거리더라. 감독님이 정말 어마어마한 정성을 쏟아 부으셨는데 노력만큼 성과가 이뤄진 것 같았다. 여러 의미로 모두에게 고마웠다”고 전했다.
영화의 배경인 1987년 6월, 당시 부산에 있었다는 김윤석은 “그 때 학교들은 다 휴교령이 내려졌고, 시험도 다 리포트로 제출했다. 그 당시 대학생들 중에서 막말로 데모한 번 안 해본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골수 운동권 아래 모인 사람만이 데모한 것이 아니었다. 곧바로 자기의 생활 자체가 연관돼 있었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나서서 대자보를 써주고 그랬다. 그 당시에는 안개가 가장 많이 낀 도시에서 살았다. 대단한 운동권은 아니었지만 나도 대자보를 써본 적이 있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화이’ 이후로 장준환 감독과 깊은 친분을 이어온 그는 감독이 시나리오 초고를 만들었을 때부터 캐스팅 1순위로 지목한 배우였다. “출연에 고민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다큐멘터리보다 더 완성도가 떨어지는 영화라면 굳이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1987’이 꼭 영화로 만들어져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야 했고, 시나리오에 그럴만한 힘이 있었다. 섣불리 건드리기 힘든 소재인데 감독님이 정말 정성스럽게 최선을 다해 작품을 만들었다. 시사회 때 영화를 처음 보면서 감독님의 손을 꼭 잡아드렸다.”
김윤석은 박처장 역으로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또 하나의 캐릭터를 각인시켰다. 투박하고 거대한 외형이지만 매서운 눈빛에 분노와 냉혹함을 오가며 상대의 오금을 저리게 만든다. 일대 다의 처지에 몰려도 자신만의 확고한 신념을 잃지 않는 문제의 인물이다. “박처장이 등장하면서 시대의 억압된 자유를 보여줘야 했다. 캐릭터의 개성 보다는 시대의 권력과 통제를 포괄적으로 담으려 했다. ‘1987’에서는 모두가 주인공이었고 그만큼 강력해야 했다. 그만큼 박처장으로 가장 강력한 악당의 모습을 그려야 했다. 극 중에서는 가장 강력한 적이 있어야 사람들이 맞서 싸운다. 영화적인 긴장감을 주려 했고 한 인간이 어쩌다 왜 저렇게 되었는지도 보여주려 했다.”
박처장의 대사 중 가장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길 것으로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습니다”가 있다. 이는 80년대 모든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할 정도로 가장 인용이 많이 된 말이었다. “그 시대의 아이러니한 이면을 보여준 정확한 발언이었다. 그 말을 내가 할 줄은 몰랐다. 박처장 조차 ‘억’이라는 추임새를 넣고 자기도 모르게 기자들의 눈치를 보지 않느냐. 그만큼 희대의 넌센스였다.”
여기에 김윤석은 가장 괴로웠던 장면으로 옥중서신을 전달한 교도관 한병용의 고문 장면을 떠올렸다. “생각하기도 싫은 시대, 그걸 표현해야 했다. 유해진 씨가 전기 고문의자에 묶여있는 장면을 촬영할 때는 그 모습만 봐도 너무 괴로웠다.”
김윤석은 박처장을 표현하기 위해 처음으로 평안도 사투리에 도전하기도 했다. 워낙 실감나는 어투에, 아이러니하게도 이념에 사로잡힌 박처장의 캐릭터가 더욱 또렷하게 살아날 수 있었다. “평안도 사투리는 이번에 처음 써봤다. 함경도 사투리는 ‘아바이’ ‘동무’ ‘오마이’ ‘김일서이’ ‘학새이’이런 식으로 연음법칙을 사용하는데, 평안도 사투리는 또 달랐다. 달달달 연습하는 수밖에 없었다. 연기에 왕도가 없다. 모든 걸 쏟아 부으면서 절제할 때는 절제 한다. 그러면서 통제를 해야 하는데, 그러면 온 신경이 곤두서게 된다. 항상 적절한 수위의 온도를 맞추려 한다.”
여전히 박처장에 몰입해 있는 그에게 박처장을 이해하는지, 시대가 만든 희생자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왜 이런 짓을 하게끔 사회가 만들어졌는가가 중요하다. 박처장은 우리가 결코 잊어선 안 되는 모습이다. 제2의, 제3의 인물이 만들어지지 않으려면 우리 모두가 해학을 가지고 박처장을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박처장은 결코 시대의 희생자가 아니고 개인이 선택한 것을 보여준다. ‘시대의 희생자’라고 언급이 안 됐으면 좋겠다. 당시의 희생자분들에게 미안하다.”
‘1987’은 거대 규모의 작품임에도 박처장, 서울지검 최검사(하정우), 교도관 한병용, 대학생 연희(김태리), 대공형사 조반장(박희순), 사회부 윤기자(이희준), 재야인사, 안기부장, 치안본부장, 박종철의 유족 등 모든 인물이 톱니바퀴처럼 유기적으로 얽혀 세세하고 밀도 있게 사건을 재조명한다. 장준환 감독 특유의 섬세함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화이’를 통해 익히 장 감독의 연출 스타일을 알고 있던 김윤석은 “장준환 감독님은 조용조용하게 디렉션을 하지만 집요한 분이시다. 섬세하게 하나하나 안 놓치는 분이다. 장준환 감독님과 작업하면 3, 4 테이크를 기본적으로 가기 때문에 각오를 해야 한다. 나는 그게 좋다. 더 믿음이 간다. 배우들이 입 모아서 ‘여기서 가장 강한 사람은 장준환 감독이다’라고 말했다. ‘화이’는 픽션이었지만, ‘1987’은 실화를 바탕으로 해서 3, 4배는 더 신경 쓰는 것 같았다. 고증과 조사에 신경을 엄청 썼던데 이번 영화 때문에 한 5년 정도는 늙은 것 같다.”
김윤석과 하정우는 2008년 ‘추격자’, 2010년 ‘황해’ 이후 세 번째 만남이다. 7년 만에 하정우를 만난 소감으로는 “그 전에도 워낙 친하게 만나던 사이였다. 배역의 분량으로 따지면 하정우 역할이 그렇게 크지 않은데 흔쾌히 연기해줘서 즐겁게 촬영했다. 웃음도 주고 객관적으로 사건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줬다”고 극찬했다.
영화에는 박경혜, 김의성, 김종수, 오달수, 고창석, 문성근, 우현, 조우진, 유승목, 그리고 특별출연으로 강동원, 설경구, 여진구, 문소리까지 수많은 출연진이 당시의 면면을 맡아 연기했다. 이들을 ‘까메오’라 지칭하는 것에 대해 김윤석은 “그 분들을 ‘까메오’라고 안 불렀으면 좋겠다. 시대의 이야기를 담는 작품이다보니 더 많은 배우분들이 참여하려고 했는데 캐스팅 마감이 돼서 못한 경우도 있다. 작은 역할로 등장하는 데도 절제하면서 연기해준 것에 너무 감사하다. 만약 내가 박처장 역을 맡지 않았어도 ‘1987’에 출연 했을 것 같다.”
특유의 집중력 있는 연기를 펼친 그에게 새삼 연기 비결을 물으니 “연극은 더 하다. 연습을 하는 수밖에 없다”고 정공법을 강조했다. 그럼 김윤석은 완벽주의일까. “영화 만드는 사람들은 모두 완벽하고 싶을 거다. 최선에 가깝게 만들고자 하는 게 그런 노력이다. 그걸 힘들다고 생각하면 이 일을 못 한다. 나중에 후회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하나의 작품으로 남아서 계속 보이게 되는데. 연기는 찰나의 갈등과 선택의 연속이다.”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작품에서 무엇보다 조심스러웠던 부분은, 박종철 열사의 죽음에 대한 부채감을 안고 이야기를 왜곡 없이 다뤄야 했다는 점이다. “2017년 1월 14일이 박종철 열사 30주기였고 부산 광복동에서 행사를 했다. 행사 주최자는 저희 고등학교 선배들이셨다. 그 때 감독님과 함께 박종철 열사의 아버님, 누님을 찾아가서 뵙고 영화를 만든다고 전했다. 누님께서 잘 만들어달라고 하셨다. 완성도가 부족한 영화가 나오면 얼굴을 못 들것 같은 부담감이 있었다. 다행히 시사회 때 유가족 분들이 보시고 합격점을 주셨다.”
아무리 친한 장준환 감독의 제안이 있었다고 해도, 연기에 욕심이 났다고 해도 암흑의 시대를 노골적으로 꼬집은 작품에 참여하기로 결정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터다. 그럼에도 김윤석은 가장 악한 인물의 탈을 쓰고 과감히 작품에 임했다. 어쩌면 민중이 가장 뜨거웠던 1987년과 2017년 모두를 거친 세대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1987년에 운동을 했던 분들이 이번 촛불집회에 참여하시더라. 다른 게 있다면 그 분들이 낳은 아이를 직접 데리고 광화문에 선 거다. 나라가 힘들 때 이런 힘들이 이어지는 구나를 느꼈다.”
/서경스타 한해선기자 sestar@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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