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이 21일(현지시간) 뉴욕 유엔본부에서 특별 본회의를 열어 이른바 ‘예루살렘 결의안’을 압도적 찬성으로 채택하자 미국은 즉각 예산 문제를 꺼내고 나왔다. 니키 헤일리 유엔 주재 미국 대사는 미국이 대외 원조뿐만 아니라 유엔에도 막대한 자금을 냈다고 강조했다. 미국은 유엔 핵심예산 54억 달러(약 5조 8,300억 원) 중 22%를 감당 중이다. 회원국 중 최대 규모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9월 열린 유엔 총회에서 아예 유엔의 방만한 재정을 개혁해야 한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첫 유엔 총회 연설에서 미국이 유엔 예산의 22%를 부담하는 부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내가 집권하는 한 다른 그 무엇보다 미국의 이익을 보호할 것”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미국은 올해 유엔 총회 기간 동안 아예 방만한 유엔의 재정 구조를 개혁하겠다며 ‘유엔 개혁 회의’를 열기까지 했다. 안토니우 구테레쉬 유엔 사무총장이 유엔의 경영을 효율화해야 한다고 공식 입장을 밝히며 ‘트럼프 달래기’에 나섰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유엔 총회의 ‘예루살렘 결의안’ 표결에 앞서 또다시 분담금 문제를 들고 나오기도 했다.
지난 10월 미국 정부가 유엔 산하의 교육·과학·문화기구인 유네스코 탈퇴 의사를 밝히자 국제 사회는 ‘올 것이 왔다’는 분위기였다. 당시 국무부가 밝힌 이유 역시 ‘방만한 재정’이었다. 미 국무부는 유네스코 탈퇴 의사를 발표하면서 “(유네스코는) 구조적 개혁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국제기구의 방만한 운영에 따른 미국의 재정부담을 더 이상 감수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기후변화 문제에 가려 있었지만 미국 정부는 파리기후협정 탈퇴 당시에도 재정분담금 문제를 제기했다. 믹 멀베이니 미국 백악관 예산국장은 “기후변화와 관련해서 대통령의 뜻은 간단하다”며 “더 이상 기후변화 방지에 돈을 쓰지 않겠다는 것이다. 세금 낭비라고 생각한다”고 입장을 밝힌 바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WB와도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 김용 WB 총재는 중국을 포함한 신흥국들의 자본 확충을 지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김 총재는 “우리가 중국과 협력해 일하는 것은 양쪽 모두의 발전뿐 아니라 중국을 보고 배우는 신흥국들에도 도움이 된다”고 밝혔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는 김 총재가 주장하는 개도국의 추가 재정 지원에 반대하고 있다. 동시에 미국은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대규모로 은행 대출을 하는 중국에 대해 대출 규정을 전면 재정비하라고 요구하는 중이다.
각국 정부와 기업들은 미국의 국제기구 이탈로 자금줄이 막힐 것이라는 우려를 의식한 듯 적극적인 ‘미국 메우기’에 나서고 있다. 지난 12일 파리기후협정 체결 2주년을 기념해 12일 파리에서 열린 ‘원 플래닛 정상회의’에서 유럽연합(EU)은 90억유로(약 11조5,600억원) 상당의 기금 조성을 선언했다. 하지만 경제 대국인 미국이 지원을 중단한다면 국제기구 역시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반론도 상당하다. 가장 위험에 노출된 기구는 역시 유네스코다. 미국 이탈 후 일본도 탈퇴를 고려하고 있다는 설이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분담금 축소는 곧 미국의 국제 영향력을 줄이는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파리드 자카리아 워싱턴포스트(WP) 칼럼니스트는 “미국이 분담금을 축소할 경우 트럼프는 중국과 같은 나라가 그 공백을 채우기 위해 재빨리 나서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랄 것”이라며 “중국은 유엔을 완전히 장악해 새로운 틀을 만들 것이며 지난 70년간 미국이 그래왔듯이 글로벌 어젠다를 독점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아마도 중국은 유엔본부를 베이징으로 이전하자고 제안할지도 모른다”며 “그렇게 되면 트럼프는 유엔본부 이전으로 공터가 되는 이스트리버의 몇 에이커짜리 부지에 수 개 동의 콘도미니엄을 추가로 지을 수 있을 것”이라고 비꼬았다.
/변재현기자 humblenes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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