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를 살린 지도자’ 또는 ‘독재자’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페루 대통령이 24일(현지시간) 사면되면서 페루의 정치불안이 심화하는 양상이다. 의회가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 페루 대통령 탄핵안을 부결시키는 대가로 쿠친스키 대통령이 후지모리 전 대통령을 사면했다는 ‘뒷거래설’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는 가운데 쿠친스키 정권이 도덕성에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는데다 후지모리 전 대통령의 정치적 계보를 잇는 제1야당인 민중권력당 내에서는 후지모리의 두 자녀 간 권력분쟁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중남미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성장세를 이어온 페루 경제가 ‘후지모리 후유증’에 발목을 잡혀 고꾸라질 수 있다는 우려도 고조되고 있다.
AP통신은 이날 쿠친스키 대통령이 반(反)인권·부패 혐의로 장기복역 중이던 후지모리 전 대통령에 대해 건강악화 등 인도적 이유로 사면을 결정했다고 전했다. 후지모리 전 대통령은 지난 1990년 취임 이후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정치안정을 위협하는 세력을 진압하며 페루 발전을 이끌었지만 반대파에 대한 강경 진압, 사법부 및 언론 장악 등 정권 말기 독재자의 길을 걸었다. 그는 재임 시절의 학살·횡령 혐의 등으로 2010년 금고 25년형이 선고됐지만 12년간의 복역기간에 잦은 발병으로 통원치료를 받았으며 최근에는 사망 임박설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사면 결정의 진짜 이유는 ‘인도적 결정’이 아닌 ‘정치적 뒷거래’일 것으로 외신들은 추정하고 있다. 쿠친스키 대통령은 재무장관과 총리직을 수행했던 2004~2013년 브라질 건설사 오데브레시에 국가 인프라 사업권을 넘기는 대가로 500만달러(약 54억원)의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탄핵위기에 직면했었다. 하지만 21일 의회 표결에서 탄핵을 추진했던 제1야당 민중권력당 의원 10명이 돌연 기권하면서 쿠친스키는 대통령직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탄핵안 부결 후 페루 정치권에서는 “후지모리 전 대통령의 차남인 겐지 후지모리 민중권력당 의원이 자신의 아버지를 석방하는 대가로 쿠친스키 대통령의 탄핵을 부결시키기로 모종의 뒷거래를 했을 것”이라는 관측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후지모리 전 대통령의 사면 결정이 의회의 탄핵안 표결 후 3일 만에 나왔다”며 “‘탄핵 부결의 답례’라는 의혹이 짙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후지모리 전 대통령의 사면은 쿠친스키 정권과 민중권력당 모두에 파장을 몰고 올 가능성이 크다. 페루 정계는 후지모리 전 대통령의 공과에 대한 해석을 두고 양분돼 있다. 당장 여당인 ‘변화를 위한페루인당’에서는 “대통령이 권력을 지키기 위해 독재자와 손을 잡았다”는 비난이 들끓고 있으며 알베르토 데 벨라운데 의원은 이날 탈당 의사를 밝혔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중심으로 사면 반대 시위를 촉구하는 게시글이 빗발치고 있어 여론을 의식한 탈당 행렬이 이어질 경우 총 130석 중 23석에 불과한 연립여당의 지위는 더욱 흔들릴 것으로 보인다.
후지모리 전 대통령의 정치적 유산을 누가 승계하느냐를 두고 민중권력당 내의 권력분쟁도 심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후지모리 전 대통령의 장녀인 게이코 민중권력당 대표와 차남인 겐지 의원이 당내에서 세력다툼을 벌이는 가운데 겐지 의원이 후지모리 전 대통령의 사면을 주도했다는 설이 지배적이어서 그가 아버지의 후광을 입어 누나와 대립각을 세울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일각에서는 후지모리 전 대통령 사면을 계기로 후지모리를 둘러싼 정치 논란에 경제정책이 모두 마비되는 일명 ‘후지모리 후유증’이 재발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페루 경제는 수출품인 구리 가격 상승에 힘입어 중남미에서 양호한 성장세를 이어왔지만 쿠친스키 대통령 취임 1년5개월이 지나도록 야당이 장악한 의회에 막혀 인프라 복구 등 온갖 정책이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정치불안이 가중되면 경제도 큰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페루의 3·4분기 경제성장률은 2.5%를 기록했다.
/변재현기자 humblenes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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