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교수들 1,000명의 설문으로 선정한 올해의 사자성어 ‘파사현정(破邪顯正)’. 사악한 것을 부수고 사고방식을 바르게 한다는 뜻의 이 말은 공연계에서도 통했다.
탄핵정국과 블랙리스트의 상흔 속에 올 상반기 주요 공연들이 저조한 실적을 거뒀지만 5월에 치러진 ‘장미대선’ 이후 정국이 안정되며 라이선스와 창작 초연작들이 봇물 터진 듯 쏟아졌다. 특히 블랙리스트 사태로 각종 지원 사업에서 집중 배제됐던 연극인들은 블랙리스트 재발 방지 대책 마련을 위해 한목소리를 내며 치유에 나섰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드(THAAD) 문제가 한한령(限韓令)으로 이어져 클래식과 난타 등 한류 공연이 직격탄을 맞았으나 소극장 뮤지컬을 중심으로 틈새 공략에 나서며 중국 시장 개척을 이어갔다.
◇탄핵정국·블랙리스트 상흔 치유 나선 공연계=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공연계는 블랙리스트 사태로 몸살을 심하게 앓았다. 박근혜 정권이 정부에 비판적인 문화예술인을 지원에서 배제하기 위해 작성한 명단의 실체가 공개된 가운데 연극계의 피해가 집중됐다는 사실이 밝혀진 탓이다.
그러나 불안한 시국과 예술인들의 피해는 고스란히 작품의 재료가 됐다. 서울 광화문 광장에 예술인들이 만든 ‘광장극장 블랙텐트’는 공공극장이 담아내지 못하던 저항과 풍자를 담아내는 그릇이 됐고 ‘2017 이반검열’ ‘창조경제-공공극장편’ ‘검열언어의 정치학’ 등은 같은 문제의식에서 탄생한 작품들이다.
진상 규명과 과거 청산 작업이 속도를 내면서 왜곡됐던 지원 정책도 속속 정상화됐다. 만점을 받고도 지원에서 배제됐던 연극연출가 이윤택의 희곡 ‘꽃을 바치는 시간’이 정부 산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심사를 거쳐 최종 지원작으로 선정됐고 블랙리스트 극단으로 불린 하땅세, 놀땅, 백수광부 등도 예술위 ‘창작산실’ 지원작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특히 블랙리스트 피해자이기도 했던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가 예술위 위원장으로 선임되면서 문예위 정상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조성진·선우예권 등 젊은 스타들 클래식 대중화 앞장=2017년은 클래식 팬들에게 맛깔스런 성찬과도 같은 공연이 이어진 한해였다. 아이돌 그룹처럼 ‘오빠 부대’를 몰고 다니는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생애 첫 베를린 필하모닉과의 협연을 성공적으로 치렀다. 베를린 필과의 내한 협연은 물론 그가 내년 1월 서울·부산·전주·대전 등 4개 도시를 순회하는 독주회 역시 예매 시작과 동시에 전석 매진됐다.
한국인 최초로 세계 4대 콩쿠르 중 하나인 ‘반 클라이번’에서 우승을 거머쥔 선우예권도 올해 대단한 활약을 펼쳤다. 그는 미국의 차세대 바이올리니스트인 벤저민 베일먼과 ‘듀오 공연’을 가진 데 이어 반 클라이번 우승 후 처음으로 독주회를 열었다.
오랜 세월 실력을 통해 명성을 구축한 세계적인 거장들도 상당한 눈높이를 자랑하는 기존 음악 애호가들의 입맛을 만족시키며 올 한해 공연장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조성진과의 협연 등을 위해 베를린 필하모닉이 4년 만에 내한 공연을 펼친 가운데 이들 못지 않은 올스타 군단인 네덜란드 로열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RCO)도 국내 관객을 만났다.
◇한한령 여파에도 소극장 뮤지컬로 틈새 공략=사드로 한중 관계가 악화되면서 난타 등 한류 공연 업계는 큰 타격을 받았다. 난타 제작사인 PMC 프로덕션은 지난 4월부터 난타 전용관인 충정로 극장을 잠정 휴관한데 이어 내년 폐관을 결정했다. 최악의 국면으로 꼽혔던 연초에는 소프라노 조수미,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현지 공연도 무산되면서 순수예술 교류에도 영향을 미치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소극장 뮤지컬을 중심으로 틈새를 파고들며 중국 시장 공략을 멈추지 않았다. ‘빨래’와 ‘마이 버킷 리스트’ ‘빈센트 반 고흐’가 호평 속에 현지 라이선스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쳤고 내년 재연을 앞두고 있다. 또 뮤지컬 ‘팬레터’가 왕자웨이 감독 소유의 음악회사인 블락투뮤직의 투자를 유치하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라이선스부터 창작까지 초연작 봇물=불투명한 정국 상황에 불경기가 겹치며 뮤지컬 시장의 한파는 이어졌지만 라이선스부터 창작물까지 다양한 초연작이 관객들을 찾았다. 시라노, 나폴레옹,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등 대작 뮤지컬들이 데뷔전을 치른 가운데 2년간의 제작 과정을 거쳐 탄생한 뮤지컬 ‘벤허’는 창의적인 무대 연출과 배우들의 호연으로 호평을 받았다.
풍성한 초연작으로 연말 뮤지컬 잔칫상도 화려해졌다. 라이선스 내한공연인 ‘시스터 액트’부터 브로드웨이 흥행 뮤지컬인 ‘타이타닉’, 24부작 드라마를 3시간짜리 뮤지컬로 성공적으로 변환시킨 ‘모래시계’, 홍광호·고은성 등 뮤지컬 스타로 중무장한 ‘햄릿 얼라이브’ 등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는 초연작들이 연말 뮤지컬 시장을 달궜다.
◇공연 문턱 낮춘 생중계 바람=올 한 해 실시간 생중계가 공연 성공방정식의 한 축으로 굳건하게 자리 잡았다. 연극, 뮤지컬은 물론 클래식, 오페라, 무용까지 다양한 장르가 생중계되면서 관객들은 그동안 쉽게 접해보지 못했던 장르의 공연을 만나볼 수 있게 됐다. 가장 적극적으로 공연 생중계 서비스를 선보였던 네이버의 경우 올 한 해 공연 실황과 쇼케이스, 프레스콜, 배우 대담 등을 포함 70여편의 공연 관련 생중계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한편 사건·사고도 끊이지 않았다. ’김수로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상업극을 선보였던 최진 아시아브릿지컨텐츠 대표는 지난 8월 자금 사정 악화로 회생 절차를 밟던 중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배우와 스태프들의 임금 미지급 사태는 올해도 이어졌다. 뮤지컬 ’넌센스2‘에 이어 뮤지컬 ’햄릿‘은 배우·스태프 임금 체불로 사전 통보 없이 공연을 취소했고 결국 조기 폐막했다.
/서은영·나윤석기자 supia927@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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