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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쇄국과 해금의 역사…조공 의미 새로 인식해야

문성근 법무법인 길 대표 변호사

문성근 법무법인 길 대표 변호사




쇄국(鎖國)과 해금(海禁)은 조선의 근본정책이었다. 이 때문에 무역이나 장사는커녕 고기잡이도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백성들이 헐벗고 굶주리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럼에도 조선은 왜 백성을 굶겨 죽이는 쇄국과 해금을 고집했을까? 혹자는 조선이 명나라의 눈치를 보느라 명의 정책을 따라했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북쪽 변방의 일개 무장에 불과한 이성계가 중앙정치에 등장한 계기는 황산전투의 승리였다. 그런데 황산전투는 진포에서 최무선 장군의 함포공격으로 배와 무기를 잃고 고려군과 굶주림을 피해 내륙으로 달아난 왜군 잔당을 소탕하는 전투라 고려군이 패배할 리 없는 싸움이었다. 그럼에도 이성계 일파는 진포전투의 의미를 일부러 깎아 내리고 황산전투의 승리를 부풀려 권력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권력을 손에 쥔 이성계는 제일 먼저 화약을 제조하는 관청인 화통도감을 무력화한다. 다른 사람의 손에 화약이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고려로 하여금 외세와의 접촉을 엄금하는데, 이는 군사적 기반인 여진족 군대를 독점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무기를 만드는 기술자들을 천민으로 만들어 장인의 자부심을 뿌리째 뽑아버렸다.

그 후 새로이 왕조를 연 이성계는 고려의 잔재를 말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가장 먼저 해외무역으로 번영을 누렸던 고려의 문화부터 지웠다. 그래서 세계사적으로 유례없이 강력한 해금과 쇄국정책을 시행했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상인을 사농공상의 최하위 천민계급에 편입시키고, 상업의 중요수단인 화폐주조까지 금지해 버렸다. 이러한 이성계의 권력탈취과정은 명의 주원장을 본받았지만, 사실은 그보다 훨씬 더 지독했다.



비렁뱅이 탁발승이던 주원장은 비적단 두목과의 혼맥으로 세력을 얻은 뒤 몽골의 지배를 받던 한족의 자존심을 자극해서 세력을 키운다. 그리고 ‘중화사상’을 내세워 다민족 제국인 원을 조각조각 분열시킨 뒤 고립된 몽골족을 북쪽 변방으로 내쫓는데 성공한다. 남경에서 천신만고 끝에 북경에 입성한 명은 몽골족의 남하를 막기 위해 강력한 해금과 쇄국을 실시한다. 그러나 해금과 쇄국은 백성들의 생업을 앗는 일이라 명조는 엄청난 반발에 시달려야 했다. 밖으로 50개가 넘는 이민족의 침공에 시달리고, 안으로 외국과의 교역으로 수천년 번영을 누렸던 동남해안지역과 내륙국경지대 백성들의 공개적 비난과 조직적 저항에 골머리를 앓았다.

동남해안 백성들의 영웅이었던 왕직은 일본의 오도열도에 무역기지를 두고 무장을 한 채 마음껏 바다를 넘나들지만 명의 해군은 손도 쓰지 못했고, 이런 현상은 내륙국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보니 황제의 통치력은 겨우 북경과 그 부근에 머물렀고, 영토 내 다른 곳에서는 외국사절의 안전을 보장하기 힘들었다. 이로 인해 명은 ‘북로남왜’라는 전대미문의 역사적 오점을 남기고, 세계사의 주도권이 동양에서 서양으로 넘어가는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만약 조선이 자유분방하고 주체적인 고려의 정치를 계승했다면 해금과 쇄국을 고집한 명조는 일찌감치 망했거나 늦어도 토목의 변(1449년)때 몰락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절대적인 원조와 지지가 있었기에 명은 200년 너머 존속했고, 망국적인 해금과 쇄국은 청나라까지 이어졌다. 이는 극소수의 만주족이 대다수 이민족을 지배하는 청의 권력구조상 고착된 제도를 바로잡기 힘들었기 때문이지만, 어쨌든 이로 인해 문명의 주도권을 서양에 넘기게 되니 동양으로서는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다. 이를 보면, 조선의 쇄국과 해금은 권력의 필요에 따라 도입되었을 뿐 덩지만 큰 이웃의 눈치를 보느라 국가정책으로 삼은 게 절대 아니다. 쇄국과 해금은 민심이나 국력과는 처음부터 아무런 상관이 없고, 오히려 역행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는 조공의 의미도 새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애초부터 조공은 강대국이 약소국에게 위엄을 과시하는 수단이 될 수 없다. 그보다는 정통성 부족으로 흔들리는 권력이 해금과 쇄국으로 인한 국제적 고립을 호도하고 백성의 불만을 미봉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따라서 조공무역을 굳이 국력이나 국가의 체면과 연계시키는 사고는 자신도 모르게 중화사상에 물든 역사적 무지의 산물이 아닌가 싶다./문성근 법무법인 길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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