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이 의결권 행사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의 핵심은 기업이 중장기적인 가치를 추구하는지 감시해 주주의 이익을 높인다는 논리다. 공적 연기금인 국민연금은 특히 감시의 자격이 충분하다고 여긴다. 기금의 성격과 운용이 법에 근거하고 감사원 감사도 받는 만큼 국민연금의 공공성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기업의 중장기적 가치 추구를 촉진한다는 대목에서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국민연금 운용자가 기업, 나아가 산업의 미래를 내다본다는 말인가.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외국은 기관투자가 유형에 따라 의결권 행사 의제가 나뉜다. 공적연금과 DB형 사적연금은 사회나 환경 관련 의제, 뮤추얼펀드는 지배구조, 헤지펀드는 재무나 경영전략 등에 주목하는 식이다. 그럼 국민연금은 이중 어느 유형에 속하나. 누구도 속 시원한 답을 내놓지 않고 있다.
대주주의 전횡을 막고 지배구조를 투명하게 만들자는 데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기업의 흥망성쇠가 도덕성으로만 결정되는 일도 아니고, 무엇보다 이사회에 대주주의 지배력을 강화하고 친인척에게 자리 하나 내주는 안건만 올라오는 건 아니다. 이 사업 분야에 얼마나 투자할지, 사업부를 떼어낼지 말지, 저 기업을 인수할지 말지 같은 경영상 중요 사항도 이사회 결의가 필요하다. 대주주 눈치 보는 ‘거수기’ 노릇을 그만두고 중장기 가치를 추구하라 했으니, 국민연금이 이런 경영상 중요 사항에도 목소리를 내라고 정부가 독촉한다고 보는 게 맞는 해석일 것이다. 생존과 번창이야말로 기업의 최고 중장기적 가치 아닌가. 그런데 경영진도 때로는 자신 없다는 이런 일을 말 그대로 국민의 노후 자금일 뿐인 국민연금이 기금 규모가 크다는 이유로 그 역할을 꼭 맡아야 할까.
지난해 12월 감사원은 2015년부터 2년 동안 35건의 기업 합병 찬반 안건을 검토할 때 내용 확인도 제대로 안 했다고 발표했다. 사실상 ‘경영상 판단을 제대로 내리라’며 국민연금을 다그친 것이다. 그 같은 허술함이 실은 수백 개나 되는 기업을 대상으로 한 투자자로서 가지는 어쩔 수 없는 한계라는 점은 못 본 모양이다. 국민연금에 경영자의 역할까지 맡기려면 나중에 경영 실패를 이유로 배임의 죄까지 물어야 공평하다. 설마 그렇게 하자는 말인가. 사실 지금 진짜 부담스러운 쪽은 국민연금이 아닐까 싶다.
/증권부=조양준기자 mryesandn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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