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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소설가 김숨 "위안부 할머니들 원하는건 진정한 사과...그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는

피해자를 구경꾼 만든 일방 조치

화해라는 귀한 단어 폭력으로 변질

'한 명'이어 위안부 소재작품 준비

할머니 회고담 형식 전작과 달리

전쟁 당시 소녀들이 주인공으로

트라우마 한복판으로 들어갈 것

소설가 김숨 /송은석기자




소설가 김숨 /송은석기자


지난 9일 정부가 발표한 ‘한일 위안부 합의(2015년)’에 대한 후속대책을 두고 뒷말이 많다. 피해 당사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은 “재협상 포기는 피해자들을 기만하는 행위”라고 분노를 드러냈다. 일본 정부는 “기존의 합의에서 단 1㎜도 움직일 수 없다”며 발끈했다. 정부의 후속대책 자체가 ‘국민 여론’과 ‘외교적 현실’ 사이에서 나온 어정쩡한 절충안인 탓이다.

정치인도, 피해 당사자도 아니지만 정부의 위안부 후속대책 발표를 누구보다 가슴 졸이며 지켜본 이가 우리 문단에 있다. 소설가 김숨(44·사진)이다. 이미 2016년 위안부 문제를 다룬 장편소설 ‘한 명’을 출간한 그는 다음 작품에서 다시 한번 같은 소재에 도전한다. ‘한 명’ 이후 벌써 위안부와 무관한 작품을 세 권이나 발표했지만 마음속 깊이 자리한 할머니들의 고통과 상처는 그를 쉽사리 놓아주지 않았다.

정치권에서 위안부 문제가 뜨거운 이슈로 부상하면서 요즘 독자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게 된 작가 김숨을 12일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처음 위안부 소재를 떠올렸을 때는 ‘과연 내가 이걸 감당할 수 있을까’ 싶어 두려웠다”며 “조심스러운 마음 때문에 자료 조사를 끝내놓고도 첫 장을 쓰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고 회고했다.

한일 양국이 피해자들의 의사를 묻지 않은 채 ‘위안부 합의’를 발표한 2015년 12월 김숨은 ‘한 명’의 초고 집필을 대략 끝낸 상태였다. “피해자들을 구경꾼의 자리로 몰아낸 일방적인 발표를 보면서 화해와 치유라는 귀한 단어가 폭력적인 어휘로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어요.”

다소 조심스럽지만 한국 정부가 최근 발표한 위안부 후속대책에 대한 작가의 입장부터 물어봤다. 아니나 다를까, 김숨은 머릿속에서 단어를 고르고 또 고르듯 한참을 고민한 끝에 겨우 말문을 열었다. 그는 “제가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이 있고 말하기 힘든 부분이 있는데…”라며 “분명한 것은 우리 정부가 고통스러운 기억을 되살려 증언을 하신 할머니들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귀를 기울이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생존자가 몇 분 안 남으셨는데 그분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결국 진정한 사과가 아닐까 한다”고 덧붙였다.

김숨이 2016년 발표한 ‘한 명’은 위안부 피해자가 단 한 사람만 생존해 있는 가까운 미래의 어느 시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인 ‘그녀’ 역시 꽃다운 시절 일본군에 끌려갔지만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기억을 되새기고 싶지 않아 일평생 자신이 위안부 피해자라는 사실을 숨기고 살아왔다. 그런 ‘그녀’가 어느 날 TV에서 생존자가 한 명만 남게 됐다는 뉴스를 접한 뒤 가슴에 묻어둔 상처와 마주하며 생존자를 만나러 가는 여정이 작품의 개략적인 줄거리다.



“‘한 명’이라는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지만 아직 미진한 부분이 많고 할 얘기가 더 남아 있다고 생각해요. (영감이) 오지 않으면 억지로 쓸 수 있는 건 아닌데 어쨌든 제 안에서 이야기가 솟아났어요. 제목은 미정이지만 집필은 이미 시작한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김숨이 준비하고 있는 차기작은 ‘한 명’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는 “일종의 회고담이자 후일담이었던 ‘한 명’과 달리 전쟁 당시의 소녀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다음 작품은 트라우마의 한복판으로 더 들어가는 이야기”라며 “단편 연작 형식을 생각했는데 쓰다 보니 길어져 결국 장편 형태가 될 것 같다”고 설명했다. “사실 ‘한 명’을 쓸 때는 기록과 증언에 많이 의존했어요. 하지만 그 책을 출간하고 나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관계자들과 피해 할머니들을 실제로 뵙게 됐어요. 그들을 만나면서 기록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들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화제를 바꿔 김숨이 지난해 12월 출간한 소설 ‘너는 너로 살고 있니’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너는 너로 살고 있니’는 위안부와 이혼, 동물 문제 등 한동안 사회적 의제를 작품에 녹여낸 김숨이 오랜만에 인간 내면의 심층을 집요하게 파고든 편지 형식의 장편소설이다. 제목이 암시하듯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 나가는 과정을 그린 이 작품에는 시적 정취와 종교적 기운이 함께 감돈다. 소설은 가난한 연극배우로 활동하던 ‘나’가 11년째 식물인간으로 병상에 누워 있는 ‘그녀’의 간병인으로 고용돼 경북 경주에 오면서 시작된다. 남을 돌보는 일을 생전 처음 해보는 ‘나’는 병원에서 걸음마를 반복하며 삶의 의지를 다지는 노인, 고통을 극복하지 못하고 끝내 자살에 이르는 마흔두 살의 폐암 환자 등 다양한 인물과 마주하며 생(生)의 의미를 조금씩 체득해나간다. 김숨은 “삶과 죽음은 문학이 던지는 첫 번째 질문이자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화두”라며 “1인칭 시점의 담담한 편지 형식으로 실존적이고 근원적인 질문과 씨름해보고 싶었다”고 소개했다.

“먼저 ‘나’라는 존재를 정확히 알아야 타인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소설 속 ‘나’는 제가 만들어낸 인물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저 자신이기도 해요. 이번 작품을 쓰면서 저를 가만히 응시하고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진 것 같아요.”

이 작품에는 작가가 언급한 삶과 죽음 외에도 소통과 단절, 만남과 이별 등 우리네 인생을 구성하는 다양한 대립항이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포개져 있다. 소설 속 화자는 ‘그녀’와의 뜻하지 않은 이별로 좌절하지만 병원에서 겪은 시간을 통해 다시 연극 무대로 돌아갈 힘과 용기를 얻는다. 신라 시대 왕들의 무덤이 있는 경주를 작품의 배경으로 선택한 것 역시 인생의 다양한 층위를 함께 다뤄보겠다는 목표와 무관하지 않았다. “2015년 출간한 ‘바느질하는 여자’를 쓸 때 경주에서 바느질을 배운 적이 있어요. 카페에서 유리창 밖으로 사람들이 능 사이를 거니는 모습을 보면서 삶과 죽음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것 같은 기묘한 느낌을 받았어요. ‘너는 너로 살고 있니’는 그때 받은 인상을 출발점으로 삼고 장편소설로 확장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어요.”

편지글이라는 형식은 이 작품이 그리는 또 다른 대립항인 ‘순간과 영원’이라는 주제와도 관련돼 있다. 소설 속에서 ‘나’는 “‘순간’ 같은 시간 개념은 어쩌면 허상에 불과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중략) 그렇다면 인간은 태어나 죽을 때까지 순간을 경험하지 못한 채 살다 가는 것이겠지요”라며 탄식한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점(點)일 뿐이기 때문에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시간 개념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가 인용되기도 한다. 김숨의 소설은 이런 관념과 정의에 맞서기라도 하듯 편지 형식으로 순간을 온전히 기록하기 위해 안간힘을 쏟는다. 인물의 전사(前事)가 영화의 ‘플래시백’처럼 사이사이에 끼어들지만 기본적으로 이 작품의 화자는 현재진행형 서술 방식을 고수한다. “편지라는 글의 형식에는 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기 마련이잖아요. 지금 떠오르는 감정을 소중히 여기면서 마치 저 자신에게 편지를 쓰는 것처럼 집필한 작품이에요. 그 덕분인지 슬픔이 담긴 소설임에도 다 쓰고 나서는 스스로 위로받고 치유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 사진=송은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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